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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경력직 신임관리자, 공직가치로 무장하여 공무원으로 다시 태어나다

왜 공직가치 내재화 교육이 필요한가?

요즘 공무원 HRD의 최대 화두는 ‘공직가치’다. 인터넷상에서 ‘공무원’에 대한 빅 데이터를 분석해보면 복지부동, 철밥통, 무사안일, 甲질, 관피아 등등의 부정적인 용어들이 다수를 차지한다. 2012년에 개봉한 영화 <나는 공무원이다> 등의 영화에서도 공무원은 주어진 최소한의 일만 하는 대단히 소극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평가가 다소 아쉽고 억울한 측면이 없진 않지만, 공무원을 바라보는 국민의 시선이 곱지 않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교육 중 강사가 ‘나의 인생그래프’ 만드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그럼에도 올해 국가직 9급 공채시험에 역대 최다인 21만 명이 몰린 것에서 알 수 있듯 직업으로서 공무원의 인기는 대단히 높다. 하지만 채용단계에서 응시자가 예비 공무원으로서 어떤 가치관과 자질을 갖추고 있는지를 검증하는 절차는 시‧공간적 제약으로 인해 한계가 있다. 그러다 보니 국가와 국민에 대해 봉사‧헌신하겠다는 열정과 의지를 가진 공무원, 즉 공무원을 하고자 하는 사람보다는 단순히 직업인으로서 공무원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이 공직에 들어오고 있다는 외부의 시선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 대목에서 예비 공무원에 대한 공직가치 교육의 필요성은 더욱 강조된다. 구성원들이 조직의 가치를 얼마나 이해하고 실천하느냐가 조직의 경쟁력을 좌우하는 만큼 신규자 입문단계에서 공직가치 교육을 강조하는 것은 최근의 HRD 트렌드에도 맞는 방향이다.


이미지 카드를 활용하여 ‘공직가치 정의 내리기’ 실습을 하는 모습

공직가치는 ‘공무원으로서 바람직한 행동의 판단기준이며 공직을 수행하면서 추구해야 할 궁극적인 목표와 기준’이며, ‘공직자로서 다양한 갈등 상황 속에서 의사결정을 위한 하나의 행동지침’이라 할 수 있다. 공직가치 교육의 목적이 예비 공무원이 공직가치를 이해하는 것을 넘어 이를 스스로 체득하고 실천하도록 하는 데 있다면 기존의 전통적인 강의식 방법으로는 분명히 한계가 있다. 왜냐하면 일반 사람들이 직업을 갖게 될 때쯤에는 이미 사회경험이 축적되어 자신만의 가치와 태도를 가지고 있을 가능성이 커 주입식 강의만으로는 개인의 가치관과 업무행태의 변화를 기대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에, 공무원으로서 맡게 될 공직의 고유한 의미와 가치를 스스로 성찰‧체득하고, 바람직한 공직 비전과 행동원칙을 설정할 수 있도록 특화된 공직가치 내재화 교육 프로그램을 개발할 필요가 있다.

합숙교육 프로그램으로 공무원 재탄생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은 ‘바람직한 공직가치 내재화 및 실천의지 고양, 공직자로서의 역할‧책임 및 기본자세 확립’을 목표로 3주 과정의 공직가치 내재화 교육 프로그램을 올해 새롭게 개발하여 신임관리자 경채과정 (합숙 2.22~3.11 / 비합숙 3.13~4.15)에서 시범적으로 운영했다.


만다라트 기법을 활용한 공직가치 실천 아이디어 도출

이 프로그램은 최근 가치 중심의 HRD 트렌드에 맞춰 공직가치 내재화 단계(점화-체화-발현)에 따라 이론‧특강과 참여형 교과를 체계적으로 연계하여 구성했다. 더불어 단체생활을 통한 공동체 의식을 함양하고 공직가치 교육의 몰입도를 높이기 위해 입교 직후 3주 동안 합숙교육으로 진행했다.

이론 및 특강 교과는 전체 교육생을 대상으로 합동교육을 실시하되, 참여형 교과는 분반(40명), 분임(20명), 팀(6~7명) 단위로 나눠 전담 FT(퍼실리테이터 / 원내교수, 외부 전문강사, 지도직원)가 다양한 주제의 토의‧토론 및 실습학습을 진행했다.


공직 롤모델 행동특성 도출 후 갤러리 워크를 하고 있다

합숙 1주차는 공직가치 입문과 국가관(애국심, 민주성, 다양성), 2주차는 공직관(책임성, 공정성, 투명성)과 윤리관(청렴성, 공익성, 도덕성), 3주차는 공직비전 설계와 퍼포먼스 순으로 설계했으며, 주차별 주제에 맞게 나의 인생그래프 그리기, 가치관 경매게임, 공직자 역할나무 그리기, 국가가 없다면 웹툰 만들기, 공직 롤모델 행동특성 도출하기, 정책사례에서 공직가치 찾기, 윤리의식 골든벨, 공직가치 스틸컷 촬영 등 흥미와 몰입도, 학습 효과성을 종합 고려한 다양한 내재화 프로그램을 개발하여 반영했다.

지도직원 멘토링 시스템 도입

이번 프로그램에는 또 하나의 특징적인 시도가 있다. 예비 공무원인 신임관리자 교육생에게 바람직한 공직자 DNA를 전승하기 위해 민간기업에서 시행하고 있는 지도선배 시스템을 벤치마킹하여 지도직원 멘토링 시스템을 최초로 도입해 운영했던 것이다.

각 부처에서 평소 근무자세가 모범적이면서 역량‧성과가 뛰어난 5급 3~5년차 선배 공무원을 지도직원으로 선발했으며, 지도직원의 역할 수행에 필요한 자질(대인관계 형성, 진정성과 열정, 코칭‧멘토링 역량 등)을 배양하기 위해 4일간 지도직원 양성과정을 별도로 운영했다. 지도직원은 합숙기간 중 학습활동 지도, 생생한 공직경험담 전수 그리고 분임별 토론학습 진행 등의 역할을 수행했으며, 더불어 교육생의 합숙생활 태도와 학습활동 참여도 등을 지속적으로 관찰‧기록한 후 이를 토대로 평가와 피드백을 하는 임무도 부여받았다. 지도직원은 교육생들과 합숙을 같이 하면서 진정성 있게 소통하며 이들을 바람직한 방향으로 잘 이끌어 주었으며, 교육생들이 공직을 이해하는 데 필요한 연결고리이자, 공직에 보다 빨리 적응할 수 있도록 경험과 지혜를 나눠주는 든든한 멘토로서 그 역할을 충분히 해 주었다.

공직가치 내재화 교육의 성과와 향후 과제

올해 새로 선보인 3주간의 공직가치 내재화 합숙교육 프로그램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는 평가 속에 마쳤다. 교육생은 물론 교육기관 입장에서 합숙교육에 대한 상당한 부담과 어려움이 있었지만 교육생들이 열정적으로, 적극적으로 교육에 참여해 준 결과라 할 수 있다. 「본 교육이 공직 기본자세 확립 및 공직가치 내재화에 도움이 되었다」는 설문 항목에서 교육생의 85%가 그렇다고 답변했으며, “다양한 참여형 활동을 통해 재미와 감동을 받았다.”, “공직가치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고 이해할 수 있는 소중한 시간이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해 주었다. 교육생들이 만든 대한민국 매거진과 메이킹 필름 등의 결과물은 향후 다른 공직가치 교육에서 교보재로 활용할 수 있을 만큼 상당한 수준을 갖추고 있다. 또한, 이번 교육에 참여한 외부 강사님들로부터 이번 교육생들의 학습태도가 매우 진지하고 열정적이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물론, 앞으로 더욱 보완‧발전시켜야 하는 과제도 있다. 일부 내재화 교육 프로그램의 내용이 다소 추상적인 측면이 있어 실제 업무현장 사례를 추가로 발굴해 보완해야 하며, 공직가치 내재화 교육의 성패를 좌우하는 핵심요소인 공직가치 전문강사 풀을 구축하여 강의내용과 내재화 학습 스킬 등을 빠른 시일 내에 전수해 교육과정에 투입할 필요가 있다. 공직가치 내재화 합숙교육 프로그램은 금년도 5월에 예정된 신임관리자 공채과정에서 다시 한번 운영한 후 그 운영성과를 모아 다른 교육기관에서도 본 교육 프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도록 사례집을 발간해 배포할 예정이다.

공직가치 내재화의 대표적인 학습활동 소개

교육생이 뮤지컬 <그리스>의 ‘summer night’를 개사한 퍼포먼스 중
어떻게 하면 멋진 공무원이 될 수 있지? 알려줘

tell me more, tell me more 비결 좀 말해봐
tell me more, tell me more 어떻게 하면 되는거야

세찬 파도가 밀려와도
어떠한 난관이 있더라도
끝까지 소신 지키며
끝까지 업무 완수하는
그것은 책임감이야
우우워~ 제일 중요하지

tell me more, tell me more 정말 그게 다야
tell me more, tell me more 솔직히 얘기해 다른 것도 있지?

어떤 유혹이 다가와도
달콤하게 손짓해도
신중히 검토해야지
두루 살펴 처리해야지
그것은 공정성이야
우우워~ 매우 중요하지

tell me more, tell me more 야 조금만 더 말해봐
tell me more, tell me more 아 궁금해 미치겠네

정보를 개방하고
정보를 공유하며
알권리 실현하는
알권리 존중하는

그것은 투명성이야
우우워~ 항상 기억해둬

쉬운 길은 아닐거야
힘든 일도 생길거야

하지만 기억해야 해
언제나 명심해야 해

교육총괄과 한현덕 서기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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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직가치, 바로 세우겠습니다!

― 공직가치 교수요원 워크숍 ―

‘공직가치’란 무엇일까? 오랫동안 들어왔고 공무원에게는 당연한 덕목이라 생각되어 그 의미를 설명하기가 새삼스럽다. 그러나 막상 공직가치의 정의를 묻는다면 한번쯤 생각하게 된다. 우리에게 공직가치는 이처럼 막연하고 추상적인 것이었다.

  • 선언적 구호였던 공직가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우리 생활에서 작동하는 실질적 모습이 되게 하기 위하여 국가인재원에서는 전 공무원에서 공직가치의 핵심내용을 체계적으로 교육하기 위한 방법을 고민해 왔다.
  • 그러나 교육내용과 프로그램이 아무리 우수하더라도 이를 전달하는 강사의 중요성을 간과할 수는 없다. 전 공무원을 대상으로 교육확산을 고려할 때 적절한 강사진의 확보는 매우 중요한 현실적인 문제이다.
  • 국가인재원에서는 공직가치 전파자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교수요원 양성을 위해 기본교육→개인별 학습(교수학습지도안 개발 등)→워크숍(강의리허설과 피드백 등)의 양성체계를 마련하고 지난 ’15년부터 준비해왔다.

‘16년 2월에 있었던 ‘공직가치 교수요원 워크숍’은 이벤트성 행사가 아닌 교수요원 후보생들이 ‘15년 12월부터 교육받고 노력해온 결과물들을 공유하고 토론하는 공직가치 교수요원 양성과정의 결실을 확인하는 자리였다.

  • 퇴직공무원과 각 공무원교육기관 교수요원들로 구성된 공직가치 교수요원 후보생들은 기본교육을 통해서 공직가치의 기본개념(애국심, 민주성, 다양성, 책임성, 공정성, 투명성, 청렴성, 도덕성, 공익성)과 가치 내재화를 위한 교수법에 대해 학습하였다.

공직가치 체계(기본개념)

구 분 의 미 핵심 공직가치
국가관 국가, 사회에 대한 가치기준 애국심, 민주성, 다양성
공직관 올바른 직무수행자세 책임감, 투명성, 공정성
윤리관 공직자가 갖추어야 할 개인윤리 청렴성, 공익성, 도덕성

  • ‘어떻게 하면 후배 공무원들의 공직가치 실천의지를 끌어낼 수 있을 것인가?’를 고민하면서 팀별로 교수학습지도안을 만들고 이를 발표하고 상호토론하면서 교수법을 익혔다.
  • 교수학습지도안 작업 과정

    • 이와 같은 기본교육을 이수한 교수요원 후보생들은 개별적으로 공직가치 강의자료 연구·개발과정을 거쳤다. 공직가치 체계에 따라 국가관, 공직관, 윤리관을 중심으로 주요 강의분야를 선정하고 그 간 공직경험을 토대로 공직가치 실천사례를 만들어내고 토론주제를 고민하였다. 교수요원 후보생들은 이러한 강의자료 개발과정을 통해 그 간의 공직생활을 뒤돌아볼 수 있었고 변화된 행정환경에서 후배공무원들이 지켜내야 할 중요한 가치에 대해 고민하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공직가치 교수요원 워크숍’은 이와 같은 일련의 교수요원 양성과정의 마지막 단계로 개인별로 개발한 강의안으로 직접 강의 리허설을 실시하고 상호 피드백 하는 시간으로 진행되었다. 기본교육과 개인별 강의자료 개발과정을 성공적으로 이수한 64명의 퇴직고위공무원과 교육기관 교수요원이 참여하였다.

    • ‘내가 완성하는 공직가치’, ‘공무원은 왜 소중한 존재인가?’, ‘국가의 어제와 오늘, 공직자의 중요성’과 같이 공무원과 공직가치에 대한 진지한 고민도 있었으며,
    • ‘백제시대의 공직가치와 청렴’, ‘거버넌스 시대의 공직윤리’, ‘남대문 화재사건을 중심으로 본 공무원의 전문성과 책임성’과 같이 자신의 전문지식이나 공직경험을 바탕으로 공직가치 개념을 풀어내고자 시도하였다.
    • 또한, ‘청렴, 손익계산’, ‘공무원 생활, 망하지 않고 성공하기’ 등 그간의 공직경험을 바탕으로 공직가치 실천을 위한 tip을 재미있게 전달해 주고자 하는 강의도 있었다.
    • 이들이 얘기하는 ‘공직가치’는 선언적이고 추상적인 구호가 아닌 백만 공무원의 업무현장과 생활의 이야기였다.

    임재호 국가인재원 교수, 김혜정 가천대 교수가 퍼실리테이터로 참여하여 교수법, 강의역량 관점에 대한 피드백을 제공하였고 강의안 개발과정에서의 고민에 대해 서로 토론하였다.

    • 좋은 동료학습의 기회였으며, 국가인재원에서는 강의 리허설을 동영상으로 촬영하고 개별 학습용 자료로 활용할 계획이다. 참가자들은 워크숍을 통해 공직사회의 변화 동인으로서 ‘공직가치’의 중요성을 깨닫고 후배공무원들에게 가치내재화를 위한 멘토로서의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는 사명감과 자긍심을 함께 갖게 되었다고 소감을 밝혔다.

    연구개발센터 이현영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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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 부처가 모여 규제개혁 현안에 대해 논의하다

― 2016년 국정과제세미나 개최 ―

최근 우리나라는 4대 개혁과제에 역량을 집중해 왔다. 그 결과 경제 활력을 회복하고 일자리를 창출하는 등 적지 않은 성과도 내었다. 하지만 여전히 세계경제의 위험요인 존재, 대내․외 리스크 상존 등 불확실성이 확대되고 있다. 우리나라의 경제성장을 위한 경제활성화의 핵심고리인 규제개혁의 필요성이 더욱 부각되고 있다. “규제개혁이라 쓰고 일자리 창출이라 읽는다.”는 말처럼 경제 도약의 열쇠는 규제개혁에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규제 등 ‘범정부적 과제’를 풀기 위해 각 부처가 협업하여 지혜를 모으는 노력이 계속되고 있다. 그 중 하나가 지난 2010년부터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국정과제세미나이다. 이는 국정운영의 중추인 실‧국장급 공무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국정운영방향을 나누는 논의의 장이다.

국정과제세미나는 매년 8월 중 연1회 열렸으나 올 해는 경제침체 등 대내․외적인 환경을 반영하여 2월로 앞당겨 개최되었고, 경제 재도약의 발판인 규제개혁에 초점을 맞추어 실장급․국장급을 대상으로 총 2회 진행되었다.

「실장급국정과제세미나」는 2월 청와대 영빈관에서 개최하여 규제개혁을 포함하여 25개의 핵심개혁과제를 중심으로 논의가 이루어졌다. 대통령은 국정과제 세미나에 대해, 경제‧사회 전반의 체질개선 등 나라 전체의 모습을 바꾸어 나가는 작업임을 기억하자는 말씀을 전하셨고, 중앙부처 25개 핵심과제를 담당하는 모든 실장급 공무원들도 그간의 성과와 앞으로의 규제개혁 방향에 대해 공유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어 3월에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 열린「국장급국정과제세미나」에서는 특히 규제개혁세션을 체계적으로 마련하여 규제개혁에 대한 심도 있는 논의의 장을 만들었다. 참가자들은 이번 세미나를 통해 “미래 국가발전을 위한 실질적인 협력의 장을 만들 수 있었고, 각 부처의 규제개혁 현안에 대해 공유하며 규제개혁 실천을 다짐하는 좋은 자리가 되었다”는 호평을 남겼다.

이번 규제개혁 세션은 영상-특강-분임토의의 입체적인 프로그램으로 마련되어 규제개혁에 대해 보다 집중적인 고민과 논의가 이루어졌다. 먼저, 국민들이 삶에서 피부로 느끼는 규제개혁에 대한 생각을 영상에 담아 전달하였고, 유민봉 전 청와대 국정기획수석, 최병환 국정과제비서관, 강영철 규제조정실장은 구조개혁과제와 규제개혁 방향 등에 대해 강의를 하였고, 참가자들은 사전에 ‘개인별 규제개혁 추진계획’을 작성해와 분임별로 ‘덩어리 규제의 원 스톱 처리’ , ‘적극행정 면책제도 강화’ 등의 주제를 가지고 해결방안 모색을 위한 열띤 토론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2월 청와대에서 개최된 실장급 국정과제세미나에서 대통령께서 언급하신 4대 구조개혁, 25개 핵심개혁과제, 규제개혁의 추진의지에 대해서도 함께 공유하고 실천을 다짐하는 시간을 가졌다.

규제개혁의 노력은 여전히 현재진행형이다. 국정과제세미나에 참석했던 모든 참가자들이 각 부처의 자리에서 “지금이 아니면 안된다.(now or never)”라는 절박함을 인식하고 규제개혁과 성장동력 회복에 힘쓰는 계기가 되었으면 한다.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도 우리정부가 더 이상 규제부가 아닌 지원부로서의 역할을 할 수 있도록 규제개혁 혁파 등을 위한 다양한 교육과 세미나를 개최해 나가고자 한다.

교육총괄과 김서전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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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공공HRD분야 인재개발허브로 발돋움하다

― 인재개발3.0 추진 ―

개방ㆍ공유ㆍ협업의 「인재개발3.0」 추진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에서는 「인재개발3.0」을 추진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기관 간 개방ㆍ공유ㆍ협업을 통해 공공재인 국가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고 상생하자는 의미로, 올해 초 33개 국가소속 교육기관에 이어 지방ㆍ공공기관 등 전 교육기관에 확산하고 있다.

이에 따라 국가인재원은 공직가치ㆍ리더십 등 「표준교육과정」을 개발ㆍ보급하고, 모든 공무원이 실무역량을 배양할 수 있도록 법제ㆍ통계ㆍ조달 등 공통직무에 관한 교육과정을 적극 개방ㆍ공유하여 대한민국 공무원이라면 언제, 어디서나 동일한 교육을 받을 수 있는 열린 교육시스템을 구축하게 된다. 따라서 각급 교육기관의 시설과 교육과정을 개방해 국민에게 다가가는 교육기관으로 역할을 확대하고, 권역별로 기관 간 개방ㆍ공유를 촉진할 것으로 기대된다.

또한 ‘e-Learning system 통합 플랫폼’인 「차세대 통합이러닝시스템」을 구축, 각 기관 간 이러닝 과정의 개방과 나아가 범정부적 자기주도 학습 환경 조성을 추진하고 있다.

민·관·학·연 협력 거버넌스 구축

본원에서는 국가지식ㆍ자원의 전략적 활용을 위해 연구기관ㆍ각종대학ㆍ민간교육ㆍ공공교육기관과의 네트워크를 구축하여 각각의 특성을 결합ㆍ활용함으로써 교육 인프라를 확대 발전시켜나가고 있다.

그 일환으로 우선 국가 아젠다의 싱크탱크인 「경제ㆍ인문사회연구회」(KDI등 소관 26개 연구기관 포함), 정보통신산업진흥원(1.22), 국가평생교육진흥원(1.29), 성균관대 국정전문대학원(3.30)과 업무협약(2.2)을 체결했다.

주요 협력내용은 전문 인력의 교류, 교육컨설팅 지원, 교육프로그램 개발, 지식정보자원 등의 활용으로, 연구와 교육을 결합한 시너지효과가 기대된다. 앞으로도 본원에서는 유관기관을 지속적으로 발굴하여 지식자원의 협력 거버넌스를 구축해 나갈 것이다.

기획협력과 김제경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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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공공부문 최신 HRD 흐름과 이슈를 논하다

― 제4차 인재개발자문단회의 개최 ―

미래지향적 공무원 인재개발 전략과 인재개발 현안에 대한 자문을 구하기 위하여 2015년 4월 인재개발자문단이 설치되었다. 정부·대학·기업 등 다양한 분야의 인사·교육 전문가 15명으로 최초 구성된 인재개발자문단은 현재 19명의 자문위원으로 확대·운영 중에 있으며, 지난 한 해 동안 3번의 전체회의, 2번의 분과회의를 통해 공무원 교육의 질적 도약을 위한 국가인재원 발전방향에 대해 조언을 아끼지 않았다.

지난 3월 29일 개최된 제4차 회의에서는 2016년 교육운영계획, 공직가치 교육 강화 등 인재원 출범 이후 주요업무 추진현황이 안건으로 다루어졌다. 인재개발자문단은 무엇보다 국가인재원의 공직가치 교육 고도화 노력을 매우 높이 평가했으며 앞으로 공직가치 개념의 구체화, 내재화 및 그 실천방안 마련에 보다 힘써 줄 것을 당부하였다.

이어서 홍석환(KT&G 인재개발원장)·신범석((주)立素 대표이사) 위원이 각각 ‘저비용 고효율 HRD전략’, ‘공무원 HRD트렌드’라는 주제로 발제에 나서 최근 민간과 공공부문 HRD 이슈와 사례를 조망하는 시간을 가졌다.

그 주요내용은 우선 민간부문에서 핵심인재 육성, 조직의 성과창출 지원 등 조직목표에 부합하는 전략적 파트너로서 HRD의 역할이 강조되고 있다는 것이다. 공공부문의 경우 역량중심 교육에 따른 역량평가(Assessment Center)와 역량개발(Development Center), 적극적 자기개발계획(IDP)을 HRD 변화의 큰 특징으로 제시하였다. 한편 조직 전체 구심력 강화를 위한 핵심가치의 내재화·체화 교육이 우선시되어야 한다는 점에서는 민간·공공부문 모두 공감대를 이루었다.

참석자들은 이러한 HRD 최신 흐름과 이슈들에 대해 다양하고 심도있는 의견을 제시하며 국가인재원 인재개발 전략 및 발전방안과의 접점을 찾고자 열띤 토의를 펼쳐 나갔다. 이번 회의에서 제안된 자문의견들은 우리 원 교육과정 운영과 향후 업무추진에 소중한 밑거름이 될 것이다.

기획협력과 류은숙 주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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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세안 10개국 공무원, 한국의 인적자원개발과정을 배우다

3월 30일부터 4월 2일까지 2주 동안 아세안 10개 국가의 인사담당 중견공무원 19명은 한국의 공무원 인사정책 및 공공분야 HRD전략을 배우고자 입교했다.

인사혁신처 방문으로 현장학습도

교육참가자들은 이번 교육이 각국의 공무원 인재개발 정책 및 전략을 수립하는데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입을 모았다. 특히, 아세한 각국이 상호 공무원 인재개발 개혁방향 공유 등을 통해 공동발전을 추구하자고 의견을 나누고 참가국 간 인재개발정책과 공무원 성과관리 등 관심사항에 대한 토의 및 의견교환으로 상호 이해 증진 및 우호협력을 강화하기로 했다.
또한 이번 교육참가들을 통해 공무원 인재개발 글로벌 전략 및 동향을 파악함으로써 한국 공무원 인재개발 개혁 방향에 대한 자료를 축적하는 성과도 거뒀다.

특히, 교육참가자들은 인사혁신처를 방문하여 공무원 성과평가제도, 고위공무원단제도, 복무․징계제도 사례와 현황 등 살아있는 현장 교육을 받았으며 각 나라 별 보고 세미나를 통해 한국과 각국 인사정책 및 제도 우수사례들을 비교분석하기도 했다.
이번 교육참가자 10개국 공무원들은 아시아의 미래와 한-아세안 협력방안에 대한 세션을 통해 향후 아시아의 정세와 한국과 아세안 회원국 간의 협력방안에 대해 심도 있는 논의의 장을 가졌다.

아세안 공무원과정 참가자 소감

먼저 훌륭한 교육과정을 준비해 준 원장님 이하 NHI 관계자분들께 연수생분들을 대표하여 감사드립니다. 교육 운영진들이 보여준 따뜻한 환대와 유익한 교육과정들을 통해 한국의 성공적인 정책사례들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다시 한 번 감사드립니다.

- Mr. Salminan H‧B, Brunei


이처럼 훌륭한 교육과정을 준비해준 한국 정부와 NHI 측에 감사드립니다. 2주 동안 한국에 대해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고 다양한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운영진들의 따뜻한 환대와 배려에 감사드리며 앞으로 귀 기관의 무궁한 발전이 있기를 희망합니다.

- Ms. Natthik Nawanno, Thailand


이번 교육을 운영한 NHI 측에 진심으로 감사한 마음을 전달합니다. 과정을 통해 한국 정부의 HRD·HRM 정책에 대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다른 아세안 국가들의 정책들도 공유할 수 있어서 매우 유익한 시간이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 Mr. Pham Minh Chau

국제교육협력관 정은희 사무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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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의 발자취를 더듬다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은 대한민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공무원의 산실이다. 또한 지방균형발전 정부정책에 따라 2016년 9월에는 본격적인 진천 본원 시대가 펼쳐질 예정이다.

국립공무원훈련원 탄생

1949년 3월 21일에 정부는 공무원교육훈련제도의 맹아라고 할 「국립공무원훈련원 직제」(대통령령 제69호)를 제정·공포했다. 이 규정에 따라 국립공무원훈련원이 설치됨으로써, 현대적 의미의 공무원교육훈련기관이 탄생하게 되었다.

국립공무원훈련원은 1949년 9월 20일부터 12월 20일까지 3개월 과정의 『현직 공무원 재훈련 과정』을 시작으로 훈련 기능을 수행했고, 6.25 전쟁 후에는 우수인력 수급을 위한 수습행정원제도 도입과 교육과정에 외국원조, 미국의 공무원제도 등이 편성되어 당시 시대 상황을 반영하기도 했다.

중앙공무원교육원으로 출범

제3공화국은 경제발전을 중심으로 국가사회 전반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이 시기에는 공무원 교육훈련 분야도 그 규모와 체제, 내용 면에서 괄목할 만한 쇄신과 발전을 이루어 나갔다. 1962년에는 혁명과업과 반공, 국민에 대한 봉사 등 정신교육 위주였지만, 1963년 3개년 교육계획을 수립해 직종별․직급별 교육으로 사무관 승진자 과정, 초급관리자 훈련과정, 직무훈련(연금, 재물조사, 보안 등) 등을 실시했다. 이에 따라 「중앙공무원교육원설치법」(법률 제747호)과 「중앙공무원교육원직제」(각령 제855호)가 공포되면서 ‘국립공무원훈련원’ 시대는 막을 내리고 그 지위와 기능이 대폭 강화된 ‘중앙공무원교육원’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대전으로 이전한 1970년대, 새마을 정신 강화

참신한 교육훈련풍토를 조성하기 위해, 「공무원훈련법」이 폐지되고 새로이 「공무원교육훈련법」(법률 제2461호)이 1973년 1월 29일에 제정되었다. 또한 1970년대에 들어 정부는 수도권 인구분산과 교육훈련의 효율화를 도모하기 위해, 각 부처별로 산재되어 있던 공무원교육 훈련기관을 통합·운영하는 계획이 추진됨에 따라 1974년 중앙공무원교육원은 대전으로 이주했다. 따라서 1975년부터 국가적인 새마을운동의 영향으로 각급 공무원교육훈련기관에서도 새마을교육을 공무원교육의 중심으로 강화했다.

과천청사 시대, 직무 및 전문 교육 강화

1980년대 제5공화국의 출범에 따라 새 시대 국가이념과 개혁의지의 고취 그리고 평화통일이념과 공직윤리관의 확립을 위한 이념교육이 강조되기 시작했다. 1981년 정부과천청사의 조성으로 중앙공무원교육원은 대전에서 과천으로 이전하여 정착하게 되었고 공무원교육훈련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했다. 같은 해 10월 총무처에서 「공무원교육훈련 중장기발전계획」(82~86년)을 수립하여 1982년부터 시행했다. 이 계획은 교육훈련의 내실화를 지향하는 획기적인 내용들이 포함된 것이었으며, 1988년부터는 전문화시대에 적극 대처하기 위한 전문교육 강화의 필요성이 증대됨에 따라 직급별 정신교육과정을 원칙적으로 폐지하고, 이를 직무교육과정에 흡수하여 운영하도록 했다.

세계화시대 부응을 위한 국제협력 강화

1990년대는 동구권의 공산주의 국가와 소련, 중국과도 외교관계를 수립하는 등 북방정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던 시기였다. 따라서 사회주의 국가인 몽골․중국 등의 공무원을 대상으로 하는 교육훈련이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실시되었으며, 사회주의 국가 공무원에 대한 교육훈련이 실시되는 발전적인 계기를 마련하게 되었다. 한편 총무처와 중앙공무원교육원이 공동 주관한 「제39차 EROPA이사회 및 행정발전 국제토론회」가 중앙공무원교육원에서 개최되어, 국제화시대에 국제협력의 증진에도 기여했으며, 이를 계기로외국의 공무원에 대한 국제적 교육훈련이 점차 확대되기 시작했다.

e-learning 교육시대 개막

2000년대에 들어 IT기술의 발전으로 「공무원 Cyber교육센터」가 중앙공무원교육원에 구축되어 공무원 e-learning 교육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2004년에는 중앙인사위원회와 행정자치부로 이원화되어 있던 공무원 인사관련 기능이중앙인사위원회로 통합되었고 중앙공무원교육원도 중앙인사위원회에 소속되었다. 이 시기에 정부는 행정의 변화와 혁신을 강조하였으며, 공공인적자원의 핵심역량 강화를 위해 중앙공무원교육원을 「혁신의 진원지」로 삼아 혁신의 성과를 전파하는 데 집중했다. 이를 위해, 중앙공무원교육원은 정부혁신 추진역량 강화를 위한 전문교육을 대폭 확대 개설했다.

공직가치 교육, 미래지향적 국가인재 양성

2010년대에 들어서면서 공직사회도 글로벌 무한경쟁시대에 적합한 전문성과 미래지향적 역량을 갖춘 공무원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이러한 기대에 부응하여 2016년 1월1일, 중앙공무원교육원은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으로 새롭게 출발했다. 공무원에 대한 전통적 교육훈련(Training and Education)이라는 개념에서 인재개발(Human Resource Development)이라는 보다 새로운 개념의 기능으로 재편하겠다는 의지가 반영된 것이다.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은 변화와 혁신을 선도하는 공무원을 양성하여 대한민국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공무원의 산실이 될 것이다. 또한 지방균형발전 정부정책에 따라 충북혁신도시로 본원 이전을 준비하고 있으며 2016년 9월에는 본격적인 진천 본원 시대가 펼쳐질 예정이다.

국가공무원인재개발원 개원기념일(3월21일)의 의미

우리원의 개원기념일은 3월 21일이다.
우리는 3월 21일을 3敎 2公 1人으로 해석한다.
3敎란 敎育生, 敎職員, 敎育課程으로 우리원의 기본적인 구성요소이며,
2公이란 公職, 公人으로 공직가치를 공무원교육의 최우선으로 삼는다는 뜻이고,
1人은 人才를 의미하는 것으로 최고의 공무원 인재를 양성하겠다는 우리원의 자부심을 담고 있다.

총무과 최원 사무관

NHI Inside

책임감과 감사의 마음

― 7급 신규자과정 교육생 소감문 ―

45기 교육생 김종호


꽃샘추위에 한층 몸이 움츠러들던 때 입교해서 6주가 지났다. 어느새 벚꽃이 만발하고 봄 내음이 물씬 풍기고 있다. 이처럼 세상의 모습이 변해가듯, 처음 만날 때는 어색하던 우리들은 6주라는 시간이 지나면서 ‘45기’라는 이름으로 하나가 되었다. 6주 동안 함께 하면서 특히 두 가지를 많이 느꼈다.

우리 앞의 무수한 책임들, 행복의 디딤돌

먼저, 책임이다. 이번 교육에서 자치회 부회장과 분임장을 맡으면서 나는 무거운 책임을 떠안았지만, 한편으로는 ‘책임감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는 수많은 책임에 직면하며 살아간다. 그리고 그 책임에 대해 힘들어하고 부담스러워하면서 기피하고 피하려는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책임이란 무조건 힘들고 부담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가령 나의 경우 가정에서는 어머니의 든든한 아들이요, 아버지의 자랑스러운 장남이고, 사회에서는 여러분과 마찬가지로 떳떳한 공무원이자 이 나라 대한민국의 미래다.

가정을 꾸려 후에 내가 가장의 책임을 지게 되었을 때 누군가의 사랑스러운 남편이자, 존경받는 아버지가 된다면 그 책임을 다할 때 가족이라는 행복감을 느끼게 될 것이고, 사회에서는 국가발전에 기여하고 국민에게 봉사할 수 있는 공무원으로서의 성취감을 얻게 될 것이다.

작은 깨달음이고, 다른 교육생들은 진작에 깨달은 점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이번 교육을 통해 내가 얻은 큰 수확 중 하나인 이런 생각을 보다 많은 분들이 함께 느껴서 우리 모두 주어진 책임에 대해 인식을 전환하여 긍정적 사고로 탈바꿈할 수 있었으면 한다.

힘든 순간을 견디게 해 줄 ‘감사’

다음은 ‘감사’에 대한 생각이다. 우리 주위를 둘러보면 사소한 것이라도 감사해야 할 것들이 많이 있다. 수료식을 빛내주는 화창한 날씨, 알차고 훌륭한 교육 과정을 거쳐 무사히 수료를 할 수 있도록 도와주신 인재개발원 원장님과 스마트 교육과 직원 여러분들, 6주 동안 즐겁게 참여해주신 45기 동기들, 환상의 궁합을 보이며 함께 일했던 5명의 자치회 간부들, 마지막으로 가족처럼 챙겨주고, 신경 써 주면서 부족한 분임장을 따라주던 우리 6분임원들에게 모두 감사한 마음을 전한다.
이처럼 업무에 복귀하고 나서도 힘든 순간이 많겠지만 그때마다 나 스스로에게, 또한 주변 사람들에게 하나하나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서 따뜻한 마음을 가질 수 있었으면 한다.

이 두 가지를 통해 스스로의 책임에 사명감을 갖고 긍정적으로 최선을 다하면서,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줄 아는 공무원이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서 우리는 살기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자살률은 OECD 1위를 차지한 지 오래고, 먹고살기 힘들다, ‘헬조선이다’ 하는 이야기들을 접하며, 공무원인 우리 역시 담당 업무를 하면서, 또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가면서 수많은 어려움에 마주칠 것이다. 힘내라는 말씀은 드리지 않겠다. 우리 모두 이미 하루하루 충분히 젖먹던 힘까지 다해서 열심히 살아가고 있을 테니까.

다만 우리가 있는 이 자리에, 이 시간에 항상 행복하기를 기도하자. 우리가 마주하게 될 어려움은 오늘도 학원과 독서실을 동분서주하는 수험생들에게는 꿈꾸는 삶이 될 수도 있으니까.
고맙다. 45기라는 이름을 주셔서, 이렇게 여러분을 만나게 되어서, 여러분을 평생 잊지 않을 것이다. 모두 행복하시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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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의 블루오션, 민관협업

― 강사톡톡 ―

서주현 / 행정자치부 협업행정과장


행정자치부에는 협업행정과가 있다. 내가 일하는 곳이다. 어떤 기관에서 다른 기관과 협업하려다가 어려움을 겪으면, 우리를 찾아오기도 한다. 그렇게 해서 중재한 일들도 많다.

민관협업은 업무에 경계 없어

군인은 아니었으나 참전했던 분들을 찾아 유공자로 예우하는 일과 관련하여 국방부와 국가보훈처 간에 협업을 중재한 적도 있다. 자동차 등록민원을 온라인으로 편리하게 할 수 있도록 국토부, 교통안전공단, 지자체 간에 중재하는 일도 요즘 하고 있다.

둘 이상의 기관이 관련되면 협업이니, 요즘 정부가 하는 일 중에서 협업 아닌 일이 별로 없다. 따라서 우리 부서에서는 개선이 필요하다 싶은 일들은 무엇이든 검토하고 추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하는 일에는 업무 경계가 없다고들 한다. 그나마 작년까지는 주로 정부기관 간이나 정부와 공공기관 간의 협업을 많이 다뤗다. 그런데 올해부터는 기업, 시민단체, 일반 국민과 협업하는 것에 더 주력하고 있다. 가뜩이나 경계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판이 더 커진 것이다. 비록 일은 많아졌지만, 무척 흥미로운 일들이 많이 생긴다.

민간의 사회공헌 활동도 복지와 연계

우리 사회에 독거노인이 많지만 행정력이 부족하여, 고독사와 같은 안타까운 일들이 종종 발생한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배달의민족’ 앱으로 유명한 ‘우아한형제들’이란 회사는 ‘골드만삭스’와 함께 ‘어르신의 안부를 묻는 우유 배달’이란 사단법인을 설립했다. 서울 성동구, 동대문구 등의 독거노인 830분에게 매일 무료로 우유를 전하는 일을 하는데 문앞에 우유가 2개 이상 쌓이면 배달원은 구청에 연락하고, 복지담당자가 출동하여 잘 계신지 확인한다. 민간의 배달 서비스와 정부의 복지 서비스가 협업하는 것이다.

산림청은 민관협업 방식으로 작년에 도시 숲 686곳을 조성했다. 면적이 91만 제곱미터나 된다. 산림청이나 지방자치단체가 부지를 제공하고, 사회공헌활동을 하는 기업이 나무를 심고, 시민단체가 관리하는 방식이다. 삼성화재는 매년 6개 학교에 숲을 만들어주고 있고, SK에너지와 계룡건설은 각각 울산대공원과 유림공원숲을 만들어 시민들에게 제공하고 있다.

민관협력, 행정에 새바람

숙박 공유경제기업인 에어비앤비(Airbnb)는 2012년 이후 미국에서 태풍 등 재난이 발생하면 신속하게 이재민들에게 무료로 숙소를 제공하는 대책을 가동하고 있다. 한때는 정부가 해야 하고, 정부만이 하는 거라고 생각하던 일이다. 아직 공유경제에 관해 제약이 많은 우리나라에서는 지난 4월 20일에 에어비앤비와 농식품부, 대한상공회의소 등이 협업하여 농촌의 민박을 외국인들에게 제공하는 협약을 맺었다.

나는 요즘 실종아동 찾기를 위해 정부와 민간이 협업하는 방안을 찾고 있다. 넓은 놀이동산이나 동물원에서는 아이를 잃어버려 발을 동동 구르는 부모가 있다. 방송을 해도 방문객들의 귀에 잘 들어오지 않는다. 이럴 때 해당 지역에 있는 모든 사람의 휴대전화번호로 문자메시지를 동시에 보내면 어떨까? 긴급재난문자 서비스처럼 하거나, 스마트폰의 메신저 앱과 위치정보 기능을 통해서 한다면 가능한 일이다. 법은 복지부가, 행정력은 경찰청이, 수단은 통신사가 가지고 있으니 서로 잘 협업하면 가능할 일이다.

민관협업은 행정에 새로운 바람을 불러올 것이다. 이미 민간부문이 하고 있는 일들을 정부의 일과 잘 연계한다면 시너지 효과를 만들 수 있는 경우가 많다. 이런 일들을 찾아서 추진하다 보면, 올 한 해는 나 자신에게도 무척 바쁘고 보람된 해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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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교육 그리고 회고

― 민간경력직 신임관리자과정 지도직원 소감문 ―

산업통상자원부 조부임 행정사무관


이번 교육은 나에게도 지도선배의 역할, ‘리더’란 어때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교육이 끝날 때쯤 ‘지도선배’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만남’은 늘 설렌다. 추운 겨울에 라일락 꽃향기가 은은하게 퍼지는 봄을 기다리듯 설렌다. 한편으로는 만남이라는 것리 두렵기도 하다. 서로의 마음을 이해하지 못해 오해가 생길까 봐서다.그런 설렘과 두려움으로 나는 민경5기와의 만남을 시작했다.

시작은 ‘지도선배’였으나…

‘지도선배’라는 단어 자체의 무게감은 상당했다. 민경5기 후배들에게 무언가를 이야기해 주고, 가르쳐주고, 알려줘야 한다는 생각 때문에 내 역할에 대한 고민이 앞섰다. 하지만 교육시간이 흘러가면서 나도 민경5기와 같이 교육을 받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올해는 처음으로 전체 ‘합숙교육’을 실시했다. 합숙을 하면서 단기간에 밀도 높은 교육을 실시해 ‘공무원의 자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한 것이다. 합숙의 취지는 좋았으나 학생들은 물론 지도선배들도 3주간 합숙이라는 미션을 잘 해 낼 수 있을지 걱정이 앞섰다. 하지만 이러한 걱정은 기우였다. 다들 모두 매우 열심히 잘 해주었다.

우린 ‘이게 뭐라고’라는 불평 아닌 불평을 하면서도 매우 열정적으로 수업에 참여하고 있는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다. 평균연령 37.5세이지만, 다들 어디서 그런 열정, 아이디어, 체력이 솟아났는지 모를 정도로 열심히 교육에 임했다. 심지어 지도선배들은 자신이 맡은 분임원들의 아이디어가 노출될까 두려워 아이디어 공유도 하지 않았다.

‘공직가치 내재화’ 교육으로 진정한 공무원의 길로

교육과정 중 가장 보람 있는 수업을 꼽는다면 ‘공직가치 내재화’를 들 수 있겠다. 민경은 자신들이 몸담았던 분야에서는 많은 경험과 지식을 쌓아 전문가들이다. 하지만 공무원의 모습에 대해서는 다소 막연해 하면서 불안한 구석이 있었다. 내 모습을 되돌아봐도 그랬던 것 같다.

‘공직가치 내재화’ 수업은 이러한 막연함과 불안감을 해소할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또한 이 수업은 우리 모두에게 ‘공무원’에 대해 깊이 고민해 볼 수 있는 시간이기도 했다. 그중에서도 특히 연극을 통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대본을 쓰기 위해 구성원들끼리 본인이 직접 겪었던 사례들을 공유하고, 공무원이라면 어떠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있어야 하는지 의견을 나누면서 자연스레 우린 ‘공무원 이란?’ 질문에 대한 나름대로의 해답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또한 이러한 수업을 통해서 지도선배의 역할도 보다 명확해졌다. 지도선배의 경험 공유를 통해 보다 실질적이며 현장감 있는 사례를 교육생들에게 제공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중에서 난 내가 느꼈던 ‘애국심’에 대해 말해주었다.

“공직에 들어선 지 얼마 되지 않아 저는 ‘한-캐나다 FTA’ 협상에 참여했습니다. 협상장에 들어가기 전에 받아 든 명찰에 새겨져 있던 ‘태극기’와 ‘내 이름’을 보니까 ‘나라’를 생각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나라의 이익을 위해 작은 단어 하나에라도 더욱 신경 쓰는 내 모습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이번 교육이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말 그대로 토끼 같은 아이들 둘을 집에 두고, 밤에 마시던 달콤한 치맥을 3주간 포기하고 합숙교육을 하는 것이 힘들긴 했다. 하지만 합숙을 했기에 후배에게 내 경험을 더 많이 이야기해 줄 수 있었으며, 때론 고민을 들어주는 상담자 역할을 할 수도 있었다. 아직은 추운 겨울 날씨에 새벽을 깨우며 구보도 했지만, 이 시간을 통해 내 옆 후배의 고민도 알 수 있었으며 그것을 함께 나눌 수 있어 추위마저 따뜻함으로 느껴졌다.

‘지도선배’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

이번 교육은 나에게도 지도선배의 역할, ‘리더’란 어때야 하는지를 생각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그리고 교육이 끝날 때쯤 ‘지도선배’란 가르치는 것이 아니라 함께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또한 개인적으로도 공무원의 마음가짐과 자세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볼 수 있는 시간이었다. 태극기만으로도 가슴 벅찼던 초심을 되새김질 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아울러 내가 가진 지식과 경험, 업무를 통해 취득한 정보를 조합해서 내 자리에서 최고의 결과를 도출하도록 노력하는 공무원이 되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부족한 지도선배를 믿고 따라와 주고 너무나도 열정적으로 교육에 참여해 준 민경5기 후배님들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전한다.

인물열전 / 동양편

우리 민족 최초의 엘리트, 최치원


채용신, 〈최치원 초상〉
1924년, 비단에 채색, 123×73㎝, 무성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엘리트란 ‘선택된 사람들’, ‘사회 중추(中樞)’ 등을 뜻하는 프랑스 말로서, 대중(mass)과 대립되는 개념이다. 일반적으로는 정치·경제·사회·문화의 각 영역에서 정책의 결정, 조직의 지도, 문화의 창조에 참여하는 소수자를 말하는데, 한반도 역사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엘리트로 신라 말의 최치원을 들 수 있다.
최치원은 자를 고운(孤雲), 또는 해운(海雲)이라고 하는데, 관직을 내려놓고 가야산으로 향하던 중 바닷가의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되어 자신의 자(字)인 해운(海雲)을 바위에 새겨 넣은 일화가 있다. 부산의 해운대가 이름을 갖게 된 사연이다.

13세에 유학 떠난 신라의 천재

이른바 ‘경주 최씨(慶州崔氏)’의 시조인 최치원은 서기 869년(경문왕 9년) 열 세 살의 나이로 당나라에 유학을 떠났다. 그 당시 세계의 제국이었던 당나라에, 그것도 13세의 어린 나이로 유학을 떠났다는 사실만으로도 최치원이 얼마나 비범한 인물인지를 알 수 있겠다.

최치원이 당나라에 유학을 떠나게 되었을 때, 그의 아버지는 “10년 동안에 과거에 합격하지 못하면 내 아들이 아니다.”라며 격려했다고 한다. 과연 최치원은 874년 당나라에서 보는 외국인 전용(?)시험인 ‘빈공과’에 급제를 해서, 관직에 나아갔다. 그 당시 『삼국지』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 거대한 변란이 중국대룩을 휩쓸었는데 그것이 바로 ‘황소의 난’이다. 최치원은 변란 시기였던 879년에 고변(高騈)의 종사관(從事官)으로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을 초하여 문장가로서 이름을 떨쳤다. 황소는 회남(淮南), 제주(諸州), 절동(浙東)을 공략하고 드디어 879년에 장안을 함락시켰다. 이에 당나라 조정에서는 사천절도사 고변을 제도행영병마도통(諸道行榮兵馬都統)으로 임명하여 반적을 토벌하게 했고, 최치원은 이해 고변의 서기가 되어 이후 4년간 종사했다. 881년 7월 8일 고변은 황소에게 항복을 권유하는 격문을 보내게 되는데, 이것이 곧 <격황소서>로 최치원이 썼다고 전해진다. 이 글은 『계원필경집』 권11에 수록되어 전한다.

이렇듯 당나라에서도 나름대로 문재(文才)를 드높이던 최치원은 885년 귀국했으나 신라 사회는 이미 붕괴를 눈앞에 두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지방에서 호족세력이 대두하면서 중앙정부는 주(州)·군(郡)의 공부(貢賦)도 제대로 거두지 못해 국가의 창고가 비고, 재정이 궁핍한 실정이었다. 889년(진성여왕 3)에는 마침내 주·군의 공부를 독촉하자 농민들이 사방에서 봉기해 전국적인 내란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에 최치원은 895년 전국적인 내란의 와중에서 사찰을 지키다가 전몰한 승병들을 위해 만든 해인사 경내의 한 공양탑 기문(記文)에서 당시의 처참한 상황에 대해, “당토(唐土)에서 벌어진 병(兵)·흉(凶) 두 가지 재앙이 서쪽 당에서는 멈추었고, 동쪽 신라로 옮겨와 그 험악한 중에도 더욱 험악해 굶어서 죽고 전쟁으로 죽은 시체가 들판에 별처럼 흐트러져 있었다.”고 적었다.

신라 말의 쇠퇴를 직접 목격

당나라에서 직접 황소의 반란을 체험한 바 있는 그에게는 고국에서 벌어지고 있던 전쟁과 재앙이 당나라의 그것이 파급, 연장된 것으로 느껴졌던 모양으로, 당대 제일의 국제통(國際通)다운 시대 감각이라 할 수 있겠다.

최치원은 귀국한 뒤, 처음에는 상당한 의욕을 가지고 당나라에서 배운 경륜을 펴보려 했으나진골 귀족 중심의 독점적인 신분체제의 한계와 국정의 문란함을 깨닫고 벼슬에의 미련을 버린 것으로 보인다.
894년에는 시무책(時務策) 10여 조를 진성여왕에게 올려서 문란한 정치를 바로잡으려고 노력하는 등 10여 년 동안 중앙의 관직과 지방관직을 역임하면서, 중앙 진골귀족의 부패와 지방세력의 반란 등의 사회모순을 직접적으로 목격한 결과, 그 구체적인 개혁안을 제시하기에 이른 것이다.


신라의 수도인 서라벌은 8세기경 최고 번성기에는 인구 100만 명, 179만 호(戶)가 거주했다.
중국의 장안, 동로마의 콘스탄티노플, 이라크의 바그다드와 함께 세계 4대 도시로 꼽히고 있다.
그림은 신라왕궁 핵심유적 복원정비 계획도 상의 월정교 지역

시무책이 진성여왕에게 받아들여져 6두품의 신분으로서는 최고의 관등인 아찬(阿飡)에 올랐으나 그의 정치적인 개혁안은 실현될 수 없었다. 당시의 사회모순을 외면하고 있던 진골 귀족들에게 그 개혁안이 받아들여질 리 만무했던 것이다. 그리고 얼마 후, 실정을 거듭하던 진성여왕이 즉위한 지 11년 만에 정치문란의 책임을 지고 효공왕에게 선양(禪讓)하기에 이르렀다.
퇴위하는 진성여왕과 그 뒤를 이어 새로이 즉위한 효공왕을 위해 작성한 각각의 상표문(上表文)에서 신라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멸망의 길로 들어서고 있던 것을 박진감 있게 묘사했다.
그러나 최치원은 신라 왕실에 대한 실망과 좌절감을 느낀 나머지 당시 사회적 현실과 자신의 정치적 이상과의 사이에서 빚어지는 심각한 고민을 해결하지 못하고 결국 은퇴의 길을 택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시대의 변화를 예견한 혜안

『삼국사기』 최치원전에 의하면, 고려 왕건(王建)에게 보낸 서한 중에 “계림은 시들어가는 누런 잎이고, 개경의 곡령은 푸른 솔(鷄林黃葉 鵠嶺靑松)”이라는 구절이 들어 있어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새로 일어날 것을 미리 내다보고 있었다고 한다.
최치원이 실제 왕건에게 서신을 보낸 사실이 있었는지 확인할 길은 없다. 그러나 그가 송악(松岳) 지방에서 새로 대두하고 있던 왕건 세력에 주목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인 것 같다.
최치원은 역사의 중심 무대가 경주에서 송악 지방으로 옮겨지고 또 그 주인공도 경주의 진골 귀족이 몰락하는 대신에 지방의 호족세력이 새로 대두하고 있던 역사적 현실을 직접 눈으로 내다보면서 살다간 사람이었다.
비록 그 어느 편에도 적극적으로 가담해서 사회적인 전환과정에서 주동적인 역할을 하지 못하고 이미 잔존세력에 불과하던 신라인으로 남아서 일생을 마치고 말았으나, 역사적 현실에 대한 고민은 그의 후계자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따라서 최치원의 문인(門人)들은 대거 고려정권에 참가해 새로운 성격의 지배층을 형성함으로써 신흥고려의 새로운 정치질서·사회질서의 수립에 선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다.

최치원이 살던 시대는 사회적 전환기일 뿐만 아니라 그에 상응하는 정신계의 변화도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그는 정신계의 변화 면에 있어서도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학문의 기본적 입장은 자신을 ‘부유(腐儒)’·‘유문말학(儒門末學)’ 등으로 표현했던 것으로 보아, 유학(儒學)이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는 유학을 단순히 불교의 부수적인 것으로 이해하거나, 왕자(王者)의 권위수식에만 이용하던 단계를 지나 새로운 정치이념으로 내세우면서, 골품제도라는 신라사회의 족적 편제방법(族的編制方法)을 부정하는 방향으로까지 발전시켰다. 유교에 있어서의 선구적 업적은 뒷날 최승로(崔承老)로 이어져 고려의 국가이념으로 확립을 보기에 이르렀다.
그는 유교사관(儒敎史觀)에 입각해서 역사도 정리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연표형식으로 정리한 『제왕연대력(帝王年代曆)』이다. 『제왕연대력』에서는 거서간(居西干)·차차웅(次次雄)·이사금(尼師今)·마립간(麻立干) 등 신라왕의 고유한 명칭은 모두 야비해 족히 칭할 만한 것이 못된다고 하면서 왕(王)으로 바꿨다.
여러 문서들을 통해 봤을 때 최치원이 인식한 한국 고대사 체계는 삼한-삼국-통일신라와 발해로 이어져오는 것이었다. 나아가 그 자신의 시대에 와서 통일신라 자체도 이미 붕괴되고 있었던 것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유교의 선구적인 역할과 아울러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문학사(漢文學史)에 미친 업적이다. 그는 신라의 문화적 전통 속에서 성립된 향가문학(鄕歌文學)과 대립되는 새로운 문학 장르를 개척했다. 『동문선』과 『계원필경』에 상당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전하고 있다.

다양한 분야에서 통합적 시각 보여

최치원은 그 자신 유학자로 자처하면서도 불교에도 깊은 관심을 가져 승려들과 교유하고, 불교관계의 글들을 많이 남기고 있다. 특히, 화엄종 사찰인 해인사에 은거한 뒤부터는 해인사 관계의 글을 많이 남겼다.
유교와 불교 외에 기타 사상으로서 지적할 수 있는 것은 도교(道敎)와 노장사상(老莊思想)·풍수지리설(風水地理說)이다. 당나라에 있을 때 도교의 신자였던 고변의 종사관으로 있으면서 도교에 관한 글을 남기고 있었던 것을 보아, 그 영향을 받았을 것을 짐작할 수 있다. 특히, 『계원필경』 권15에 수록된 「재사(齋詞)」에서 그의 도교에 대한 이해를 보여주고 있다.
그의 사회에 대한 인식이나 역사적인 위치가 선승(禪僧)이자 풍수지리설의 대가였던 도선(道詵)과 비슷한 점은 주목할 만하다.

이처럼 유학자라고 자처하면서 유교 외에 불교나 노장사상, 심지어는 풍수지리설까지도 아무 모순 없이 복합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조화에 노력한 흔적은 그의 글 여러 곳에서 나타나고 있다. 최치원은 중앙의 진골 귀족들의 독점적인 지배체제와 그들의 고대적인 사유방식에 반발하여 신라 고대문화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새로운 사상운동의 선각자 역할을 자처했다.
그러나 말년에 와서의 소극적이며 은둔적인 생활은 시대적인 제약성을 스스로 극복하지 못함으로써 신라 말 고려 초의 사회적인 전환기에서 중세적 지성의 선구자로 머물다간 아쉬움을 남겼다.
최치원은 『계원필경』 20권, 『금체시』 5수 1권, 『오언칠언금체시』 100수 1권, 『잡시부』 30수 1권, 『중산복궤집』 1부 5권, 『사륙집(四六集)』 1권, 문집 30권 등 수많은 저작물을 남겼다.

우리 민족 최초의 엘리트로 각인되는 최치원, 그는 오늘날 우리 엘리트 집단인 공무원들이 다시 한번 주목해봐야 할 인물임에 틀림없다.

인물열전 / 서양편

익살과 유머, ‘윈스턴 처칠 스타일’의 소통

2003년 영국 BBC 방송이 ‘가장 위대한 영국인’에 대한 설문조사 결과 윌리엄 셰익스피어, 엘리자베스 1세, 근대 과학의 아버지로 일컫는 뉴턴을 제치고 국민의 28% 이상의 지지를 받아 1위에 오른 인물, 한때 종군기자로 활동하며 필력을 인정받고 아마추어 화가로 활동할 만큼 그림 솜씨도 뛰어났던 인물, 욕을 의미하던 V를 승리 ‘Victory’의 의미로 만들어 냈으며 유머를 얘기할 때 늘 등장하는 인물이 바로 처칠이다.

떡잎 시절 알아보지 못한 ‘될성부른 나무’

윈스턴 처칠은 귀족 가문 출신이다. 제7대 말보로 공작 존 스펜서 처칠의 삼남 랜돌프 헨리 스펜서 처칠과 미국의 부호 레너드 제롬의 딸 제니 제롬(결혼 전 이름) 사이에서 태어났다. 처칠은 학교에서 말썽꾸러기 낙제생이었다. 생활기록부에 따르면 그는 ‘품행이 나쁜 믿을 수 없는 학생으로, 의욕과 야심이 없고 다른 학생들과 자주 다투며, 상습적으로 지각하고 물건을 제대로 챙기지 못하며 야무지지 못하다.’는 것.


1889년, 삼수 끝에 기병으로 들어간 샌드허스트 사관학교 시절(왼쪽), 1904년 하원의원 시절(오른쪽)

성적도 하위권이었지만 역사 과목만은 뛰어났다. 저명 정치인의 이름을 따서 학교 이름을 짓는 전통은 거의 없는 영국임에도 오늘날 처칠의 이름을 딴 초등학교만 10개가 넘는다는 사실은, 적어도 처칠의 학창 시절만 놓고 보면 아이러니컬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삼수 끝에 1893년 샌드허스트 사관학교에 입학했지만, 성적이 좋지 않아 보병이 아닌 기병을 지망할 수밖에 없었다. 기병 지망생에게는 처칠이 지독히도 싫어하는 수학 공부를 요구하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러나 제 적성을 찾았기 때문인지 150명 중 8등의 성적으로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처칠은 쿠바와 인도 등의 임지를 전전했지만 별다른 전공을 세우거나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처칠은 승진보다는 종군기자로서의 경력에 더 관심이 있었다. 그는 기자로 활동하고 책도 쓰면서 대중적 관심을 끌었고, 특히 1899년 남아프리카 보어전쟁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전쟁 영웅으로 각광받았다.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1900년 보수당 후보로 출마, 하원의원에 당선됐다(25세). 보수당의 보호관세정책에 반대하여 1904년 자유당으로 옮겼고, 1906년부터는 자유당 내각의 통상장관, 식민장관, 해군장관 등을 역임하며 승승장구했다.

우리가 잘 아는 처칠은 오늘날 처칠식 리더십에 대한 연구가들이 생길 정도로 빼어난 리더십을 발휘했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는 우리 식의 속담대로라면 그는 별종인 셈이다. 리더에게 요구되는 여러 자질 중 으뜸가는 것은 ‘소통’이다. 리더란 조직을 이끌어나가는 사람이기에 조직 구성원이나 비즈니스 파트너에게 긍정적이고 발전적인 영향을 미쳐야 하기 때문이다.
윈스턴 처칠은 빼어난 ‘소통 방식’을 통해 자신에게 호의적이지 않던 의회의 지지를 얻고 제2차 세계대전이라는 시련 속에서 영국인들을 하나로 규합할 수 있었다.

‘소통’을 위해 ‘평범’을 택하다

정치적 수사(修辭)는 정치철학과 별개로 정치가의 의도를 국민에게 전달하는 능력으로 ‘스킬’을 필요로 하는 분야다. 왜냐하면 정치가의 ‘말’은 어떻게 전달하느냐에 따라 비수가 되어 듣는 이에게 상처를 줄 수도, 어머니의 손길이 되어 위로를 줄 수도 있고 때로는 태풍처럼 온 세상을 뒤집는 위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정치적 수사에 능했던 인물이 바로 윈스턴 처칠이다. 그는 권한이나 권력에 연연하기보다 자신이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 연설할 때 어떤 표현을 써야 더 효과적일까 고민하고 자신의 말이나 지시가 잘못 전달되지 않도록 다양한 연구를 시도했다. “생각한 일을 정확한 양으로 종합해 표현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게으르기 때문이다”라고 말할 만큼 말하는 방법에 대해 진중하게 고민했다.

그러한 처칠이 선택한 방법은 폼 잡지 않고 간결하게, 평이하지만 정확하게 말하기였다. 보통 리더들이 말하기나 연설을 두려워하는 까닭은 남다른 표현이나 권위가 느껴지는 말을 사용하려고 애쓰기 때문이다. 청중의 눈높이를 고려하지 않은 채 전문 용어나 어려운 말을 사용하여 자신의 연설을 고급스럽게 포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처칠이 옥스퍼드 대학 졸업식에서 했던 연설을 보면 ‘뭔가 있어 보이는’ 표현을 찾는 일이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를 알 수 있다.
지금까지 위대한 연설로 찬사 받고 있는 “Never give up! Never, never, never, never, never, never give up!”은 특별한 표현이 없을뿐더러 단순하기까지 한 문장으로, 처칠은 쉬운 말로 중요한 표현을 강조함으로써 청중의 뇌리에 적어도 한 가지 이상의 메시지를 남기는 연설을 했다.
대부분의 청중은 여럿을 대상으로 하는 연설을 들을 때 그다지 적극적으로 경청하지 않고 제아무리 좋은 정보라도 한 달이 지나면 80% 이상을 잊어버린다. 이를 감안하여 처칠이 했던 것처럼 중요한 이야기는 그 중요도만큼 반복해서 말하거나 짧지만 명쾌하게 표현하는 습관을 가져야 할 것이다.

웃음은 소통의 가장 효과적인 코드

처칠은 솔직하고 가식이 없다 보니 걸핏하면 논쟁을 벌였고 무례한 행동을 하는 경우도 다반사였다. 그래서 거칠게 느껴지고 폭군처럼 비치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 대한 세간의 평가를 익살과 유머를 통해 말끔하게 해소함으로써 ‘처칠 스타일’의 커뮤니케이션을 만들어냈다.
상대방에 대한 은근한 비판이 포함되어 있는 유머는 처칠 유머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대서양헌장을 둘러싸고 처칠과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사이에 신경전이 벌어지고 있을 때 루스벨트 대통령은 처칠이 묵고 있던 방에 갔다가 목욕 중이던 처칠의 알몸을 보고 말았다.
이때 처칠은 당황하는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보시다시피 영국의 수상은 미국의 대통령에게 아무것도 숨길 것이 없습니다”라는 말을 던졌고 이로 인해 정상회담은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한다.


사진작가 유서프 카시(Yousuf Karsh)가 찍은 처칠의 모습.
전쟁을 치르며 영국을 이끄는 그의 카리스마를 담아내려 했는데,
처칠이 도무지 입에서 시가를 놓질 않자
사진가는 처칠이 입에 문 시가를 손으로 쏙 잡아빼버렸다.
열받은 처칠이 얼굴을 잔뜩 찌푸린 바로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셔터에 담아낸 것이다.

처칠의 유머 한 토막 더.
대기업의 국유화를 놓고 치열한 설전을 벌이던 의회가 잠시 정회되자, 처칠을 비롯한 의원들이 모두 화장실로 몰려갔다. 화장실에는 빈 자리가 딱 하나 있었는데, 그곳은 국유화를 강력하게 주장하는 노동당 당수 애틀리의 옆자리였다. 처칠이 이 애틀리의 옆자리에는 가지 않고 다른 자리가 빌 때까지 계속 기다리고 서 있자 애틀리가 물었다.
“제 옆자리가 비어 있는데 왜 그냥 서 계십니까? 혹 저한테 불쾌한 감정이라도 품고 있어서 그런가요?”
처칠의 대답,
“천만에요. 괜히 겁이 나서 그럽니다. 당신은 무엇이든 큰 것만 보면 국유화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인데, 혹시 제것을 보고 이것도 국유화하자고 달려들면 큰일 나니까요.”

처칠은 이렇듯 유머를 최상급의 소통 도구로 이용함으로써 인간적이고 따뜻한 이미지를 갖게 됐다. 자신의 단점이나 약점이 될 수 있는 거침없는 말이 탁월한 유머감각으로 날개를 달았으니 유머 감각의 가장 큰 수혜자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은 유머는 어떤 정형화된 기술을 익힌다고 생기는 것이 아니라 매사에 자신 있고 여유가 넘칠 때 비로소 자연스럽게 구사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상대를 인정하고 내 페이스대로 움직여라

처칠은 오늘날의 리더들에게 가장 중요하고 유용한 팁을 한 가지 더 알려준다. 바로 상대를 인정하고 내 페이스대로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이다. 이는 자신이 상대에게 기대하는 바를 말해두는 방법으로 심리학에서 ‘레테르 효과’라 부르는 것이다. 히틀러에게 영국 상륙을 단념시킨 일도 이 레테르 효과를 잘 활용한 처칠의 힘이었다.
실수하지 않기를 바라는 사람에게 “자네는 참 침착하고 치밀하게 일을 처리할 것 같아”라고 말하는 식으로 상대에게 어떤 장점을 지니게 하고 싶다면 그 장점을 이미 가지고 있다고 말해주는 것이다. 새로 만난 사람과 좋은 친분을 유지하고 싶다면 “오랜만에 품이 넉넉하고 큰 스타일을 가진 분을 만난 것 같습니다”라고 말함으로써 상대를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이끌 수도 있겠다. 처칠은 이런 방법을 사용하여 “카리스마 있고 사람을 움직이는 리더”라는 평가를 얻었다.

사람의 마음을 얻고 관계를 유지하는 건 결국 말 한마디에서 비롯된다. 처칠은 말하는 방법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이를 자신만의 스타일로 실행에 옮김으로써 역사상 가장 위대한 연설가이자 리더로 남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