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Webzine vol.32
메뉴열기
E - Newsletter
NHI Column

차가운 동토마저 녹여낸 뜨거운 예술혼

NHI Column · 인물탐구

차가운 동토마저 녹여낸 뜨거운 예술혼

- 원고 위에 남긴 열정의 이름, 조명희(趙明熙) -
조명희 작가를 기리는 문학비 (사진출처 : 고려사람(Koryo-saram.ru)
지난 1988년 우즈베키스탄 타슈켄트시 국립원고연구소 문학박물관에 특별한 인물을 기리는 상설전시관이 세워졌다.
바로 한국 근대 민족 문학의 선구자, 포석 조명희(趙明熙, 1894~1938)다.
나라가 안팎으로 흔들리던 혼돈의 시대에 민초들이 견뎌야 했던 모진 삶을 원고 위에 써 내려간 그는
누구나 살기 좋은 세상을 꿈꾸며 어떤 핍박에도 굳은 의지를 꺾지 않고 불꽃처럼 살다 갔다.
민중으로 태어나 보통 사람을 위한 글을 쓴 문학가
조명희 작가 (사진출처: http://commons.wikimedia.org)
민중으로 태어났기에 보통 사람을 위한 글을 썼다. 하여 많은 이의 마음에 애국의 불씨를 지폈다. 100여 년이라는 세월이 지났지만, 대한민국 문학사가 여전히 조명희를 기억하는 이유다.

충북 진천군 진천읍 벽암리 수암마을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운 성장 과정에서도 무사히 소학교를 마치고, 서울로 상경해 중앙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할 만큼 배움에 뜻이 깊었다. 그러나 질기게 따라다니는 가난 탓에 중퇴를 결정하고 한동안 방황하다가 1919년 3·1 운동 가담으로 투옥 생활을 겪으면서 사회를 보는 통찰력을 키우기 시작했다. 출소하자마자 일본 유학을 떠나 도쿄 도요대학 동양철학과에 입학한 건 그 일환이다.
가족과 함께 찍은 사진(왼쪽에서 네 번째가 조명희 작가) / (사진출처:고려사람(Koryo-saram.ru))
처음으로 희곡에 발을 내디딘 건 유학생 모임인 학우회를 통해 훗날 한국 최초의 근대 극작가로 명성을 떨치는 김우진(金祐鎭)을 만나 연극에 관심 두면서부터다. 그 영향으로 1921년 일본에서 돌아와 창작 희곡 <김영일의 사(死)>를 순회 공연해 전국적으로 큰 호응을 얻으며 민족주의 신극 운동을 전개했다. 또 1923년 발표한 역사극 <파사(婆娑)>는 근대 희곡사가 가장 중시하는 주제인 민족해방과 인습 타파 문제를 최초로 표현해냈다. 이듬해 적로(笛蘆, 갈대 피리)라는 필명으로 낸 시집<봄 잔디밭 위에>에선 우리만의 혼을 담은 시를 찾아 귀 기울여야 한다고 당당히 주장했다. 서구적 향락에 심취해 허영을 노래하는 당시 문학계에 일침을 가한 셈이다.
일제의 탄압을 피해 러시아로 이주…재소 한인 문학 건설에 힘쓰며 활발히 활동
1925년부터는 카프(KAPF, 조선프롤레타리아예술가동맹) 창설회원으로 활동하면서 프로 연극운동 단체인 불개미 극단을 조직해 민족주의 연극운동가이자 희곡작가, 시인, 소설가 등으로 활약했다. 또한 궁핍한 소시민 지식인의 갈등을 그린 <땅속으로>·<R군에게>와 농토에서 쫓겨나 간도, 일본 등의 도시 빈민으로 떠도는 비참한 삶을 담은 <농촌 사람들>·<마을을 갉아 먹는 사람들>을 선보였다. 더불어 1927년 탄생한 대표작 <낙동강>은 프로 문학의 기념비적 작품으로 자리매김했다.
저서 <낙동강> 표지 (사진출처 : 고려사람(Koryo-saram.ru))
그런데 조선 문단에서의 활발한 활동은 8년에 그쳤다. 사회 체제에 맞지 않는 글을 쓴다며 일제의 탄압이 심해졌다. 이에 1928년 러시아로 망명해 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육성촌과 우수리스크, 하바롭스크 등으로 옮겨 다니며 재소 한인 문학 건설에 힘썼다. 이주 첫해에는 저항시 <짓밟힌 고려>를 발표했고, 이어서 신문<선봉> 편집자, 잡지 <노력자의 조국> 주필 등으로 계속해서 펜을 놓지 않았다.
러시아 하바롭스크에서 조명희 작가와 가족이 3년 간 거주한 집 (사진출처:고려사람(Koryo-saram.ru)
모든 작품이 빛을 봤다면 좋았겠지만, 아쉽게도 현지에서 수용할 수 없었던 작품은 분실하거나 출판을 거부당했다. 장편소설 <붉은 깃발 아래서>와 작품집 <두 얼굴의 조각> 등이 이처럼 시간 속에 사라져간 아까운 글이다.
오명으로 마감한 44년의 아까운 생, 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재평가하다
조국을 떠난 삶은 평탄하지 않았다. 나라 잃은 국민을 환대하는 곳이 있을 리 없다. 러시아 역시 마찬가지였다. 1937년 소련 공산당 서기장 스탈린은 연해주에 살던 우리 동포들을 중앙아시아로 강제 이주시켰다. 이 무렵 저항을 막기 위해 사회 지도자급 한인 2,000여 명을 체포해 처형했는데, 이 명단에 조명희가 섞여 있었다.

일제 치하를 떠나서 민중 문학의 부흥을 찾아 살이 에이는 동토로 왔건만, 친일 스파이와 반혁명 분자라는 오명이 씌워졌다. 그가 억울하다는 사실을 세상이 알고 있다는 게 불편했을까. 결국 1938년, 소련 정부는 공개재판의 기회조차 주지 않고, 비밀리에 총살했다.

44년의 찬란한 생이 다시 양지에 모습을 드러낸 건 러시아 흐루쇼프 정권이 들어선 1956년 7월이다. 극동군관구 군법회의에 의해 복권하면서 약 20년 만에 불명예를 벗었다. 우리나라에선 1988년, 「월북문인의 해방이전 작품 공식해금조치」 이후 재평가받아 현재는 디아스포라·고려인 문학의 아버지로 손꼽히고 있다.
진천에 위치한 조명희문학관 (사진출처:진천군청(www.jincheon.go.kr)
한 세기가 지난 지금도 곳곳에선 여전히 그를 그리워한다. 중국 연변은 2001년 연변포석회를 창립하고 2002년부터 연변포석문화제를 매년 개최하고 있다. 또, 2006년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 극동기술대학교 교정엔 조명희 문학비가 세워졌다. 고향인 진천읍 벽암리는 문학비와 포석문학공원을 조성했으며, 매년 10월 포석 조명희 문학제를 열어 올해로 25회째 성공리에 마무리한 바 있다.

조국을 떠나도록 등 떠민 일제와 갖은 누명을 씌워 생을 거둬간 소련 정부가 끝내 꺾지 못한 조명희의 고매한 정신은 문학으로 남긴 자취 위에 또렷이 남아 변함없이 우리를 반긴다.

인용 출처 /

E - Newslett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