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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bzine vol.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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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꽃 같은 삶, 불멸의 애국혼

이상설 독립운동가

불꽃 같은 삶, 불멸의 애국혼


<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우리나라 최초로 망명 임시정부를 수립하고 한인 기지촌, 군관학교를 설립한 사람은? 그렇다면 우리나라 최초의 무상교육은 누가 도입했을까? 지금보다 111년 앞선 1906년에 무상교육이 이뤄졌다. 이 질문들에 대한 답의 주인공은 모두 동일 인물이다. 바로 독립운동가이자 위대한 교육자, 보재 이상설(李相卨) 선생이다.
올해는 그가 낯선 땅 니콜리스크에서 눈을 감은지 꼭 100주년이 되는 해다. 하지만 이상설 선생은 그의 업적만큼 제대로 조명되지 않았다.
이상설 선생은 성균관장을 지낸 유학자이자, 최초로 망명 임시정부를 세운 독립운동가다. 또 우리나라 최초의 가로쓰기 산수 교과서를 편찬했고, 근대식 교육기관인 서전서숙(瑞甸書塾)을 세워 무상교육을 실시한 인물이다.



1.독립운동가의 탄생
이상설선생은 충북 진천군 덕산면 산척리 산직마을에서 이행우(李行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총명함이 하늘을 찔렀다고 한다. 결국 1894년 조선왕조 마지막 과거인 식년문과에 급제했다. 1896년에는 성균관 교수가 됐고, 탁지부 재무관에 임명됐다. 이 무렵 미국인 선교사 헐버트와 친교를 맺고 신학문도 공부했다.

<사진 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2. 을사늑약에 맞서다
그의 업적은 수도 없이 많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반대 상소문’은 빼놓을 수 없는 대목이다. 1904년 일제가 황무지 개간권을 요구해왔다. 그는 부당성과 침략성을 들어 반대 상소문을 올리고, 대한 협동회를 조직해 전국적인 항일 운동을 펼쳤다. 이듬해에도 계속됐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자 고종에게 을사 오적의 처단을 주장하는 상소를 무려 5차례나 올렸다. 같은 해 11월 30일 을사늑약에 대항하기 위해 민영환이 자결하자, 이상설 선생 역시 종로에서 민족항쟁을 촉구하는 연설을 한 다음 자결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사진 출처: 국가보훈처>




3. 서전서숙, 무상교육의 출발점
이상설 선생은 위대한 교육자이기도 하다. 그는 1906년 조국을 떠나 상해와 블라디보스토크를 거쳐 러시아령 연해주 연추로 가서 이동녕, 이범윤 등과 국권 회복운동의 방략을 협의하고, 만주 용정촌으로 떠났다. 이곳에서 우리나라 최초 민족교육기관인 서전서숙을 설립했다. 자신의 사재를 털어 학생들에게 필요한 책과 학용품 등을 무상으로 제공하며 항일민족교육에 힘썼다.

<사진 출처: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사업회>




4. 헤이그 특사, 불타는 독립의지
이상설 선생은 고종의 신임을 받았다. 1907년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발의로 네덜란드 수도 헤이그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가 개최됐다. 이때 고종은 이상설 선생을 정사로 정하고, 이준과 이위종을 부사로 삼아 파견했다. 결국 해당 회의에 참석하지 못했으나 세계 언론인들을 상대로 일제의 만행과 한국의 독립의지를 밝혔다.

<사진 출처: 증보 이상설전>




5. 최초의, 최초에 의한, 최초를 위한
이상설 선생은 낯선 이국땅에서도 오로지 조국을 위한 마음뿐이었다. 그는 1909년 이승희, 김학만, 정순만 등을 불러 러시아와 만주 국경지방 싱카이호 남쪽 봉밀산 부근에 한인들을 이주시켰다. 그리고 우리나라 최초의 독립운동 기지라 할 수 있는 한흥동 기지를 세웠다. 1910년에는 보다 효과적인 항일전을 수행하고자 유인성, 이범윤 등과 연해주 방면에 의병들을 모아 13도의군을 편성했다. 1914년, 최초의 망명 임시정부도 수립했다. 그는 이동휘, 이동녕, 정재관 등과 함께 중국과 러시아에서 대한광복군정부를 세우고 정통령에 선임됐다. 상해임시정부보다 5년이나 앞선 일이다.

<사진 출처: 역사공간>




6.대한광복군정부 해체, 그 후
이상설 선생에게도 고난이 찾아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을 맺은 것. 이후 러시아 정부는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했다. 또 한인들의 정치, 사회적 활동을 일체 금지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건립 직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사실상 해체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1915년 3월 신한혁명당을 결성,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사진 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7.마지막 유언, 또다시 조국 광복
이상설 선생에게도 고난이 찾아왔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러시아와 일본이 동맹을 맺은 것. 이후 러시아 정부는 연해주 일대에서 활동하고 있던 한인 주요 지도자들을 체포하거나 추방했다. 또 한인들의 정치, 사회적 활동을 일체 금지했다. 대한광복군정부는 건립 직후 치명적인 타격을 받았고, 사실상 해체에 이르렀다. 하지만, 그는 굴복하지 않았다. 1915년 3월 신한혁명당을 결성, 독립운동을 이어 나갔다.

<사진 출처: 증보 이상설전>

“동지들은 합세해 조국 광복을 기필코 이룩하라. 나는 조국 광복을 이루지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나니 어찌 고혼인들 조국에 돌아갈 수 있으랴. 내 몸과 유품은 모두 불태우고 그 재도 바다에 날린 후 제사도 지내지 말라”



이상설 선생은 한 맺힌 유언을 남겼다. 고인의 유언에 따라 아무르 강가에 장작을 쌓아 놓고 화장해 그 재를 북해 바다에 날렸다. 끝내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으나, 그의 행보는 우리 독립 운동사에 한 획을 그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후 정부는 이상설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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