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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

인물칼럼

임진왜란의 또 다른 영웅 이순신과 마지막 같이한
‘이영남’ 장군


협상을 할 때 중재자의 존재 여부는 협상의 성공여부를 판가름할 정도로 중요하다. 중재자의 말 한마디에 따라 협상이 결렬되기도 하고, 위기에 처한 협상이 재개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사회가 다원화될수록 중재자의 역할은 더욱 중요해지고 있다. 조선중기 무신 중에도 이러한 중재자의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한 장군이 있다. 바로 이영남 장군(1563~1598)이다.


이영남 장군은 진천 출신으로 부모상을 당한 12세에 3년간 시묘한 효자였다. 무예에 출중하여 1584년 19세 때 급제하였고, 소비포권관, 강계부판관, 율포만호, 가리포첨사를 지냈다. 임진왜란 발발 당시 그는 원균 휘하의 율포권관으로 재직하고 있었으며 양 진영을 오가며 청병사절 역할을 했다.

사이가 소원한 원균, 이순신 오가며 연결고리 역할
그의 역할을 높이 사는 이유는 사이가 좋지 않았던 원균 장군과 이순신 장군 사이를 오가며 연합함대를 구성하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장군과 원균 장군의 사이가 소원한 정도는 역사적 사료에도 기록되어 있다. 원균 장군은 임진왜란 때 이순신과 함께 옥포해전, 합포, 당포, 한산도 등 여러 해전에 참전해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후에 선조 임금은 한산도 대첩의 공을 높이 사 이순신 장군을 전라도, 경상도, 충청도 수군을 모두 통제하는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고, 원균은 자신의 공이 빠진 것에 불만을 가진 것으로 보인다. 김응남과 선조가 나눈 대화에 이러한 상황이 나타나 있다. 선조가 고언백과 김응서가 자리 때문에 다투는 이유를 묻자 김응남이 이처럼 답한다.

“대개 공 다툼으로 이와 같이 되었다 합니다. 당초 수군이 승전했을 때 원균은 스스로 공이 많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이순신은 공격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선거이(宣居怡)가 힘써 거사하기를 주장하였습니다.
이순신의 공이 매우 크지도 않은데 조정에서 이순신을 원균의 웃자리에 올려놓았기 때문에 원균이 불만을 품고 서로 협조하지 않는다 합니다.”
《선조실록》 57권 선조 27년, 1594년 11월 12일 中

이영남 장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연합함대를 요청한 1592년 임진왜란 당시도 그들의 사이는 소원했다. 더욱이 연합함대를 요청한 시기는 원균 장군이 왜군에 의해 동래성이 함락되고 도망가려 한 때라 상황이 녹록하지 않았다. 그럼에도 이영남 장군은 전라좌수사 이순신 장군에게 원병을 청해 연합함대를 결성하는 데 성공했다. 껄끄러운 그들의 관계에서 이영남 장군이 이순신 장군에게 지원병을 요청하는 일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원균 휘하의 인물인 이영남 장군은 어떻게 이순신의 마음을 얻었을까. 이영남 장군은 이순신 장군과 예전부터 인연을 이어왔던 사이였다. 이운룡 장군도 이러한 점을 알고, 원균 장군이 병력을 흩어 피신하려고 할 때 율포만호 이영남 장군을 청병사절로 임명할 것을 주장했다.

이영남 장군이 훌륭히 청병사절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이유를 이전부터 쌓아온 인간관계 측면에서만 바라볼 수 없을 것이다. 훗날 이순신 장군의 측근이 된 그를 보면 여러 가지 복합적인 사실을 고려해봐야 한다.

윗사람의 잘못한 점도 보고하는 강단
그는 옳다고 생각한 것은 하고야 마는 강단 있는 성격이었다. 이영남 장군은 원균 휘하에 있으면서도 이순신 장군에게 때때로 그의 잘못을 보고한 일이 있다. 난중일기에 이러한 내용이 드러나 있다.

이영남, 이여염이 와서 원영공(원균)의 비리를 들으니 더욱더 한탄스러울 뿐이다.
이영남이 왜군의 작은 칼을 두고 갔다. 그때 이영남에게서 들으니 강진에 사는 2명이 살아서 돌아왔는데, 고성으로 붙들려 가서 문초를 받고 왔다고 한다.
이순신, 개정판 교감완역 『난중일기』, 노승석, 여해(2016), 1593년 3월 2일 中

곧바로 당포에 이르니, 이영남이 와서 만나고 수사(원균)의 망련된 짓이 많음을 상세히 말했다.
이순신, 개정판 교감완역 『난중일기』, 노승석, 여해(2016), 1593년 5월 8일 中

자신이 모시고 있는 상관이라도 거침없이 비리를 보고했던 점을 보면 그의 성격이 어떠했는지 알 수 있다. 강직한 성품을 지녔던 그가 청렴결백한 모습으로 공무에 임하는 이순신 장군과 만난 것은 운명적이지 않았을까.

탁월한 청병사절 역할 이면에는 자신의 철학과 이순신 장군과 뜻이 맞았기에 교섭에 성공할 수 있었을 것이다. 후에 이순신 측근이 된 이영남 장군은 그의 곁에서 업무를 도왔다. 전라좌수영과 경상우수영이 연합함대가 구성된 후 소비포권관으로 재직하며 이순신 장군을 보좌했고, 여러 차례 해전에서 승전보를 울렸다. 가리포첨사로 있을 때 이영남 장군은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에 출전하여 승리를 거두고 이순신 장군 곁에서 숨을 거둔다.

< ​사진출처: 한국학중앙연구원 >

현재 이영남 장군의 묘는 충청북도기념물 제144호로 지정되어 진천군 덕산면에 있다. 이영남 장군의 묘소 근처에는 소나무와 참나무가 맞붙은 연리목이 있는데 이영남 장군과 이순신 장군의 환생물이라 전해지고 있다.

이영남 장군은 우리에게 생소한 이름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순신 장군은 알아도 곁에서 그를 훌륭하게 보좌한 이영남 장군은 알지 못한다. 이순신 장군이 숱한 해전에서도 승리할 수 있었던 까닭은 구성원 각자가 임무를 충실히 수행했기에 가능했다. 이순신 장군이 아무리 뛰어나도 구성원들이 따라가주지 않았으면 실패했을 것이다.

우리도 사회를 구성하는 핵심 멤버 외에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들을 알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현재 화두가 되고 있는 4차 산업혁명 또한 융복합 시대를 강조하고 있으며, 이는 한 사람만 돋보이는 체제가 아니라 구성원 각자의 역할을 중요하게 여긴다. 유능한 청병사절에서 이순신 장군 곁에서 훌륭한 보좌를 한 이영남 장군을 알아보는 일은 그러한 점에서 의미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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