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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넓은 만주에서 힘차게 일으킨 항일운동의 횃불

NHI Column · 인물탐구

드넓은 만주에서 힘차게 일으킨
항일운동의 횃불

조국 독립을 위해 앞장선 고매한 애국정신, 신팔균(申八均)
혼란한 시대조차 국권 회복의 꿈을 꺾지 못했다. 백척간두(百尺竿頭)에 선 나라를 구하고자 향리인 진천을 중심으로
민족 교육을 꽃피웠으며, 드넓은 만주 일대를 아우르는 독립운동 최전선에서 갖은 고생을 마다치 않았다. 그 열정의 횃불은
결국 광복으로 이어졌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 조국을 위해 살다간 신팔균(申八均, 1882~1924) 장군을
우리가 기억해야 하는 이유다.
진천 명문가의 후예, 민족교육 운동으로 주권 회복을 위한 길에 나서다
장군의 생가가 있는 진천군 이월면 노원리의 평산 신씨 세거지 / ⓒ디지털진천문화대전
숭고한 애국정신을 가슴에 품고 평생 군인의 길을 걸었다. 한국 독립군 총사령관을 지낸 지청천(池靑天), 연해주에서 명성을 떨친 김경천(金擎天) 등과 더불어 만주 항일 독립투쟁의 선봉에 선 ‘삼천(三天)’으로 불리는 동천(東川) 신팔균의 생애다.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졸업증서(왼쪽)와 보병 부위 임명장(오른쪽) / ⓒWikimedia Commons
1882년 출생한 그는 진천에서 대대로 뿌리내려온 명문가의 후예로 성장했다. 할아버지 신헌(申櫶)은 전권대관을 맡아 조선 최초의 개항을 열었으며, 아버지 신석희(申奭熙)는 병마절도사,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바 있다. 이 같은 선대의 영향 덕분에 성품이 청렴하고 문무에 두루 출중했던 소년은 1900년 대한제국 육군 무관학교 보병과에 입교해 참위로서 첫발을 내디뎠다. 그러나 날로 기울어가는 국운을 그저 지켜봐야 했던 청년기는 고뇌의 연속이었고 심지어 1907년 8월엔 일제가 주도한 군대 강제 해산을 목도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울분을 참지 못해 장병들과 함께 대항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군복을 벗었다.
변함없이 넉넉한 품으로 맞이해주는 고향은 방황의 시기에 더할 나위 없는 위로였다. 민족혼을 일깨우고 항일 애국 사상을 고취하자는 명목으로 진천군 이월면에 문을 연 사립 보명학교(普明學校, 현재의 이월초등학교)는 교육 운동의 본거지로 자리 잡았다. 또, 같은 시기에 각 지역 의병부대, 동지 등과 긴밀히 연락하며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의 발판을 마련했다.
서로군정서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양성한 독립군만 3,500여 명
보명학교의 민족교육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이월초등학교 / ⓒ디지털진천문화대전
진천에서 보낸 2년은 민족교육사업과 구국 투쟁의 기반을 닦는 소중한 시간이었다. 특히 1909년엔 전국 각지의 애국청년 80여 명과 대동청년당(大東靑年黨)을 창설했다. 훗날 광복까지 존속하며 지하 독립운동에 투신한 이 조직은 철저한 보안을 토대로 머물고 있는 지역에서 적극적으로 계몽 교육을 전파해 나갔다.
그러나 1910년 8월, 대한제국의 운명은 일본의 강압에 의해 국권을 뺏기는 경술국치(庚戌國恥)로 치달았다. 따라서 신팔균은 더욱 활발한 항일 운동을 위해 여력을 결집해 만주로 망명했다. 이로써 대종교 지도자인 서일(徐一)과 독립운동단체인 중광단(重光團)에 가입해 의병으로 북간도 곳곳을 누볐으며 3·1운동에 앞서 민족지도자 38인의 일원으로 대한독립선언서에 서명하고 발표했다.
만주를 무대 삼아 전개한 다양한 치적 가운데 가장 눈에 띄는 대목은 역시 독립군단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에서의 활동일 테다. 이때 앞서 이야기한 지청천, 김경천 등의 맹장과 신흥무관학교 교관으로 참여해 독립군 3,500명을 배출해냈다. 또, 수시로 일본 군경과의 격렬한 전투에 참전해 승리로 이끌었으며 민족반역자 숙청, 군자금 모금 등에서 명성을 떨쳤다.
학살과 방화를 자행한 일본의 대규모 병력 투입에 맞서 남만 지역 홍경현에 새로 항전기지를 구축한 뒤엔 2만여 명의 이주 한인을 보호하고 무장한일전에 힘을 보탰다. 더불어 1924년엔 지역 독립단체가 대통합해 새로이 수립한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의 의용군 사령관으로 군사를 지휘했다.
항일운동에 뜻을 함께한 일가…대한통군부를 울린 소식이 조국 독립의 불씨를 지펴
신팔균 장군의 뛰어난 통솔력과 희생정신 하에 모인 독립군은 점차 체제를 갖춰가고 있었다. 주권 회복의 꿈을 위해 막 박차를 가하려던 차였다. 그런데 사령관으로 부임한 해, 예상치 못한 비극이 일어났다.
홍경현 이도구의 산악지대에서 한창 군사훈련을 진행하던 중 일제의 사주를 받은 중국 마적 300여 명의 기습공격을 마주했다. 전투 태세를 갖추지 못한 상황이었기에 장군은 모든 대원이 안전지대로 대피할 때까지 격전지를 지켰지만, 불행히도 그 자신은 적탄에 쓰러져 유명을 달리했다. 향년 42세의 일이었다.
신팔균 장군(왼쪽)과 운명을 함께한 부인 임수명 여사(오른쪽) / ⓒ디지털진천문화대전
마땅히 이 소식을 가족에게 알려야 했으나 동지들은 차마 그럴 수 없다고 판단했다. 북경에서 어렵게 남매를 기르고 있는 부인 임수명(任壽命) 여사는 당시 만삭의 몸이었다. 따라서 일체 함구하고 고국으로 돌아가도록 주선했다. 각고의 노력으로 두 달 뒤인 9월, 여사는 무사히 딸을 출산했다. 그러나 둘째 아들을 병으로 잃는 동시에 남편의 순국 사실을 뒤늦게 접하고야 말았다. 결국 만주에서 풍찬노숙하며 같이 고난을 견디고 비밀문서 전달, 독립군 후원 등에 동참한 아내는 갓난아기와 자진해 뒤를 따랐다.
개인의 영달과 가정의 안위를 내려놓고 빼앗긴 조국을 되찾기 위한 여정에 모든 걸 바친 신팔균 장군의 일가가 남긴 소식은 대한통군부 전체를 울렸고, 독립의 불씨를 지폈다. 1963년 정부는 그 공훈을 기려 건국훈장 독립장을, 임수명 여사에겐 건국포장(1977년)과 건국훈장 애국장(1990년)을 추서했다.
비록 그토록 염원하던 나라의 광복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았지만, 장군이 진천과 만주 곳곳에 남긴 민족의 자긍심과 교육열은 긴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 여실히 남아 우리에게 전하고 있다.
신팔균 장군을 기리는 사적비 / ⓒ디지털진천문화대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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