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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를 다시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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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유구를 다시 보다 서유구는 누구인가? 백성의 삶을 먼저 생각하다

서유구는 누구인가?
풍석 서유구(1764~1845)는 정조, 순조, 헌종 등 세 명의 임금을 모시며 32년간 공직생활을 하고 은퇴한 행정전문가였다. 그는 손수 농사를 지으며 백성의 삶을 높이고자 실천한 최고의 실학자이며 행동하는 관료였다. 『임원경제지』라는 거대한 책을 썼음에도 불구하고 서유구를 아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는 1870년(정조14) 증광 문과에 합격하여 내직으로는 대교, 부제학, 이조판서, 우참찬을 거쳐 대제학에 이르렀으며, 외직으로는 전라군수를 비롯해 관찰사 등 요직을 두루 거치며 32년간 관료생활을 했다.
관직 10년 만에 9품 하위직에서 정3품 당상관이 되었으니 초고속 승진을 해오며, 승승장구한 것이다. 그러던 1806년 작은아버지 서형수가 김달순 옥사에 연루되어 유배를 가게 되자 자진해서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으로 내려가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남에게 빌붙어 살지 않기 위해 스스로 농사를 지으며 능동적 삶을 개척함으로써“자립하는 삶”을 추구하였다.
그러던 중 1823년 작은아버지 서형수가 사망함으로써 죄인의 명단에서 제명되자 다시 관직으로 돌아와서 관직을 그만둘 때까지 어떻게 하면 백성의 삶이 질적으로 향상될 수 있는지 끊임없이 연구하고, 기록함으로써 모든 관료들의 모범이 되고자 했다.

서유구를 다시보다
‘서유구’를 검색어로 공식적인 기록을 찾아보면 『조선왕조실록』 에서는 64회, 『일성록』에 707회, 『승정원일기』에는 1401회, 규장각 일지인 『내각일록』에는 무려 2788회 언급된다. 이처럼 당대 최고의 관료였으며, 학자로 인지도나 조정에서의 활동상을 짐작할 수 있는 서유구가 아직도 세상 밖으로 나오지 못한 것은 무슨 이유일까?
아마도 그것은 서유구의 역작『임원경제지』에 대한 접근이 어려웠기 때문일 것이다.
서유구의 할아버지는 대제학을 지낸 보만재 서명응이고, 아버지 서호수 역시 대사성, 대사헌 등 청관직을 거쳐 규장각의 직제학을 지냈으며, 어머니는 한산 이씨로 대사헌 충정공의 따님이다. 이런 가풍 속에서 자란 그의 성격이나 품성은 작은 아버지 서형수가 쓴 『풍석전집』 서문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풍석이 약관도 안 되었을 때 나(서형수)에게서 오경과 사서와 당송팔가문을 배웠다. 의심이 나면 반드시 간절하게 물었고, 물었으면 반드시 끝장을 보려했다. 하나라도 딱 들어맞지 않으면 바로 고개 숙여 생각에 잠기고 눈썹을 찌푸리면서 뜻을 여러 번 되새겨 보다가 깔끔하게 들어맞으면 말을 끝내기도 전에 옹알이하듯이 이상한 소리를 질렀다.”
호기심이 많고 의심이 나는 문제를 끝까지 물고 늘어지는 집요함에서 대학자가 될 자질을 타고났으며, 결국 『임원경제지』라는 거질의 책을 편찬할 수 있는 저력이 형성되었다.

서유구와 공익성
1. 대를 잇는 저술, 백성의 삶에 천착하다
서유구 집안은 경화세족 중에서도 대표적 경화세족의 일원으로 장서가 집안이며 거질의 책을 편찬한 학자 집안이었다.
서명응(1716~1787)은 많은 서적을 널리 섭렵하고 역학에 능하였기 때문에 당대 최고의 학자인 정조도 경사(經史)에 의문이 생기면 서명응에게 손수 질문하였다 고 하니 집안 대대로 이어지는 학식의 경지를 가늠할 수 있다. 대표작으로는 1786년 정조에게 진상한 『보만재총서』가 있다.
생부인 서호수(1736~1799) 역시 다양한 수학서와 천문학서를 비롯하여 농서 등을 집필했다.
서유구의 집안은 남성들만 책을 쓴 것이 아니다. 서유구의 형인 서유본(1762~1822)의 부인인 빙허각 이씨(1759~1824)는 가정백과사전인ㆍ 규합총서ㆍ를 한글로 집필하였다. 여성이라면 반드시 알아야 할 ‘술’,‘음식’, ‘길쌈’등을 기록해 놓음으로써 할아버지, 아버지, 형수에 이르기까지 백성들의 삶이 윤택해질 수 있는 방법을 다방면에서 모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서유구는 대표적인 경화세족이지만 다른 경화세족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관료 학자로서 백성들의 삶에 천착했다는 점이다. 서유구의 집안에서는 대를 이어 백성들의 삶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에 대한 관료로서의 고민이 남달랐으며, 그 결과 서명응의『본사』에서 시작된 농서는 서호수의 『해동농서』를 거쳐 서유구의 『임원경제지』에서 그 빛을 보게 된 것이다.

2. 초계문신, 인재양성의 초석을 다지다
과거에 급제한 1790년 서유구는 규장각 초계문신으로 발탁되었다. 정조가 초계문신 제도를 시작한 것은 1781년으로 이 제도의 시행배경은 다음과 같다.
“근래의 젊은 문관들은 과거에만 급제하면 곧 내일은 다했다고 생각하여 책 한자도 읽지 않고 글 한 줄도 짓지 않는다. 따라서 자연히 서적은 묶어서 버려두고 무엇에 쓰는 물건인지 도무지 관심도 없다. 이러한 분위기가 점점 고질이 되어 바로잡기가 쉽지 않게 되었다. (중략) 그러니 문신 당하관 중에 나이를 제한하고 선발 대상을 넓혀 매달 경사(經史)를 강하고 정문(程文)을 시험 보며 월말에 모아서 점수를 매기고 근만(勤慢)을 비교하여 상벌을 행한다면 문풍을 진작하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될 것이니, 문신 참상과 참하에서, 나이 몇 세 이상을 뽑아 보고하라”
이처럼 능력이 인정되어 뽑힌 인재라 할지라도 규장각에 소속시켜 학문을 연마시키고자했던 초계문신제도는 늘 연구하는 관리자를 키우고자 했던 정조의 정책을 통해 풍석의 연구가 더욱 빛을 발했다고 할 수 있다.

3. 행동하는 관료, 직접 농사를 짓다
서유구가 일상의 중요함을 인식하게 된 것은 관직을 그만두고 고향 장단에 내려오면서부터이다. 승승장구하던 관료생활은 작은아버지 서형수의 유배로 자진사퇴의 형식을 취해 물러났다.
사환으로서의 의무에서 벗어나 본격적으로 농사에 뛰어 들었으나 직접 농사를 짓고 가족을 건사한다는 것이 얼마나 힘들고 어려운 일인지를 절감했다. 다시 관직생활로 돌아와서는 더욱 농사의 중요성을 깨닫고 일상에서의 질 높은 삶을 영위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였다. 그 결과 직접 농사지으며 느꼈던 생생한 삶의 고민을 다양한 정책을 수행함으로써 해결하고자 했다.
‘공직자’의 장점이 무엇인가? 혼자서는 이룰 수 없는 해결할 수 없는 일을 조직을 통해 시험해보고, 적용해볼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아니었겠는가? 물론 철저한 기획이 수반되어야 하고 그 결과에 대해서는 책임도 져야 했다.
풍석은 농정에 전념하여 농업전문서 『행포지』를 1차 완료했고(1825), 구황을 없애기 위해 고구마 재배법인 『종저보』를 편찬 보급했으며(1834), 호조판서 재임시에는 자신의 소신이었던 골에 작물을 재배하는 법인 견종법(물을 충분히 공급할 수 없는 논은 밭으로 바꿔 밭벼나 조, 맥류 같은 곡식을 재배하는 방식)을 활성화했다.

임원경제지를 완성하다
『임원경제지』는 113권 54책으로 구성되어 있다. 다양한 농사법부터 요리, 건축, 건강, 의학, 문화, 풍수, 상업에 이르기까지의 내용을 담은 거질의 실용백과사전이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생활을 윤택하게 할 수 있는 방법을 모색하기 위한 실용서라는 점이다. 물론『임원경제지』를 편찬함에 있어서 여러 가지 책을 고증하는 방법이 채택되었지만 자신의 생활경험에서 나온 글을 인용하고 있어 그 가치가 더욱 높다고 하겠다.
서유구는 1845년 82세의 나이로 영면했다. 이유원의 『임하필기』에는 풍석이 마지막 숨을 거두는 모습이 기록되어 있다.
“풍석태사는 82세에 병이 위독해졌는데, 시중드는 자에게 곁에서 거문고를 타게 하고는 곡이 끝나자 죽었다. 이는 지인(至人)이 형체를 잊어버리고 혼백만 빠져나간다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내가 공의 가장(家狀)을 열람하면서 이 사실을 접할 때마다 망연히 탄식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개 부귀영화를 누리거나 가난하게 살거나 세상을 떠날 때에는 똑같은 것이다. 공은 평소 축적한 가산을 죽기 전에 다 나누어주고 거문고를 들으면서 평온하게 잠들었고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없었으니 보통 사람은 본받아 행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인용)
『임원경제지』를 통해 서유구의 삶을 반추해 보는 것은‘백성의 삶의 질’을 높이고자 했던 당대 최고의 관료로서 삶을 즐기며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에 대한 고민에서부터 출발한 결과라고 생각한다.

조선의 브리태니커라 불리는
임원경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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