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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켜낸 애민 정신의 길

NHI Column · 인물탐구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지켜낸
애민 정신의 길

시대를 앞서간 조선의 위대한 수학자, 최석정(崔錫鼎)
최석정의 영정 /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유교 사회였던 조선에서 등한시한 수학과 과학의 가치를 일찍이 알아본 천재가 있었다.
세계 수학사에 널리 이름을 알린 레온하르트 오일러(Leonhard Euler, 1707~1783)보다 무려 67년이나
앞서 9차 직교라틴방진(Orthogonal Latin Square)의 원리에 통달했으며
만백성이 평안한 태평성대를 구현하는 데 진심을 기울인 행정가로 살다간 그 이름은 최석정(崔錫鼎, 1646~1715)이다.
12살에 주역을 이해한 신동, 입신의 길에서 진가를 증명하다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아는 신동이 나타났다. 서당 다니며 겨우 천자문을 또박또박 읽는다는 9살, 즉 요즘으로 치면 초등학교 2학년인 아이가 어른조차 어려워하는 시경(詩經)과 서경(書痙)을 줄줄 읊었단다. 그뿐 아니라 12살엔 유교 경전 가운데 하나인 주역(周易)을 읽고 이해하는 경지에 이르렀으니 과연 집안의 기대가 대단했을 테다.
이처럼 유년 시절부터 비범한 재능으로 세상을 놀라게 한 최석정은 1646년 현재의 진천군 초평면 금곡리에서 태어났다. 영의정을 지낸 할아버지 최명길(崔鳴吉)과 한성부판윤을 역임한 아버지 최후량(崔後亮)의 영향으로 입신에 뜻을 둔 건 17세의 일이다. 초시와 진사시에서 장원을 차지하며 생원시까지 거침없이 통과한 26세엔 비로소 승문원에 속해 본격적인 관직 생활을 시작할 수 있었다. 또한, 사관을 거쳐 홍문록에 올랐다가 응제시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두며 호랑이 가죽을 하사받는 영예를 안았다.
그런데 온화한 성정, 뛰어난 행정 역량 등을 두루 갖춘 바와는 별개로, 벼슬길은 나름의 부침이 있었다. 자고 일어나면 형세가 바뀔 정도로 붕당정치가 극에 달했던 시대를 만난 탓이다. 결국 홍문관 부제학으로 있던 1685년(숙종 11년)에 스승인 윤증(尹拯)을 변호하는 과정에서 파직당하는 상황에 이르나 이내 선기옥형(璇璣玉衡, 고대 중국의 천체 운행 ․ 위치 관측 장치) 수리에 참여하며 자신의 진가를 입증한다.
오일러보다 67년이나 앞서 마방진의 개념을 밝힌 수학의 선구자
구수략(왼쪽)과 레온하르트 오일러(오른쪽) /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 Wikimedia Commons
일찍이 탈 주자성리학 사상을 펼친 남구만(南九萬)과 박세채(朴世采)의 가르침을 받아 유교적 틀에만 얽매이지 않았던 최석정은 배움을 실천하는 학문인 양명학을 존중하고 수학, 천문학, 역학 등을 다양하게 수용했다. 또, 당대 과학기술 분야 선진국이었던 중국을 돌아보는 기회를 통해 서양 선진문물을 접하고 적극적으로 받아들였다. <천학초함(天學初函)>, <동문산지(同文算指)> 등 다채로운 서적을 조선에 소개한 배경이다.
더불어 그간 쌓아 올린 해박한 지식의 가능성을 <구수략(九數略)>의 저술을 통해 꽃피웠다. 총 네 권에 달하는 이 책은 주역의 괘에 나타난 형상과 변화를 응용해 수에 대한 이해를 독려한다. 우선 갑(甲) 편에서 가감승제의 사칙을 태양(太陽, +) ․ 태음(太陰, –) ․ 소양(小陽, ×) ․ 소음(小陰, ÷)으로 소개한다면, 을(乙) 편은 기본 연산을 다룬 응용문제를 제시하고 있다. 개방, 입방, 방정 등을 설명하는 병(丙) 편을 통해 이론을 확립하고 나면 부록인 정(丁) 편에서 문산 ․ 주산과 새로운 산법을 배울 수 있다.
더욱 놀라운 점은 구수략에서 오일러보다 67년 앞선 수학적 개념을 찾아볼 수 있다는 사실이다. 바로 마방진으로 알려진 세계 최초의 9차 직교라틴방진인데 가로세로 9칸의 방진마다 1부터 81까지의 수가 하나씩 들어가 있고, 어느 방향으로 더하든 합이 같다는 특징이 있다. 원래 스위스 수학자 오일러가 발표했다고 알려졌지만, 조선의 학자가 훨씬 먼저 알아냈다는 기록을 증명하면서 원조로 인정받았다.
학문을 활용해 사회를 이롭게 하는 데 주저 없이 앞장서

청나라에서 들여온 달력인 시헌력 / ⓒ 한국학중앙연구원

주지하다시피 실질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학문에 관심을 보인 최석정은 그저 아는 데 그치지 않고 백성을 위한 정책에 응용하고자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연달아 겪으며 후유증을 앓은 조선 사회의 제도는 폐단이 팽배했다.
따라서 그는 군역 의무를 지지 않고 도망간 자를 친족이 대신하는 족징(族徵)과 이웃이 끌려가는 인징(隣徵)을 바로 잡길 건의했다. 또, 화폐제도가 문란해 발생한 서민의 궁핍한 사정을 돌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말하자면 실무 행정 개혁을 통해 도덕적 이치를 지키고 나라 전역의 전결(田結)을 파악해 합리적으로 조세를 부과하자는 의미였다. 물론 현실 가능한 데서부터 점진적으로 나아간다면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는 정책 철학을 든든히 뒷받침한 존재는 수학이었다.
더불어 청나라에서 들여온 시헌력(時憲曆)을 조선 사정에 맞게 해석해 농업 생산성을 향상하고자 했으며 기상관측 관청인 서운관의 최고 책임자인 서운관영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며 천문학 연구의 성과를 한 단계 끌어올렸다.
영의정의 자리에 8번 오른 비결은 백성을 생각한 ‘마음’
문(文)을 칭송하는 시대에 실학의 잠재력을 이야기하기란 쉽지 않은 만큼, 삶의 모든 순간이 평탄하진 않았다. 그러나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행정가이자 현실에 유용한 학문을 연구하는 학자로서 최선을 다했다. 당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우의정과 좌의정을 거쳐 8번이나 영의정이라는 요직에 오를 수 있었던 비결이다.
정계에 머무는 동안 최선을 다하고 미련 없이 고향인 진천으로 낙향해 후학 양성에 힘쓰다가 70세의 일기로 세상을 떠난 최석정. 유학자이면서 관습과 명분을 뛰어넘어 애민을 우선으로 여긴 그의 생애는 우리에게 이상적인 행정가의 길이란 무엇인지 다시금 상기하게 한다.

최석정의 묘소 / ⓒ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글. 오민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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