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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버이 살아 실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NHI Column · 인물탐구

어버이 살아 실제 섬기기를 다하여라

하늘도 감탄한 효자, 김덕숭(金德崇)
조선 시대 최고의 성군인 세종대왕의 마음을 움직인 효자가 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와 진천군 이월면 효자문에 전설과도 같은 일화를 남긴 김덕숭(金德崇, 1373~1448)이다.

아픈 어머니를 위해 눈 덮인 한겨울에도 싱싱한 잉어와 미나리를 구해 봉양했다는
그의 지극한 효심은 무려 600여 년의 세월을 넘어 우리에게 묵직한 감동과 교훈을 선사한다.
밖에선 고려가 멸망에 이르고 조선이 새 시대를 여는 격변이 이뤄지고 있었으나 김덕숭의 어린 시절은 자못 평화로웠다. 송도판윤이었던 아버지 김천익(金天益)을 따라 혼란의 시기를 맞이한 송도(現 황해도 개성)를 떠나 진천에 정착한 덕분이었다. 이 고즈넉하고도 아름다운 고장에서 그는 효경(孝經, 효를 주제로 한 유교 경전)을 즐겨 읽는 아이로 소문이 자자했다고 전해진다.
< 살아생전 김덕숭이 행한 효도를 기록한 비문과 효자각(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
갓 20대에 들어선 1939년(태조 2년)부터는 아버지의 뜻에 따라 출사해 사헌부 장령을 비롯한 다양한 관직을 역임하면서 선정을 베풀었다. 특히 목천 현감으로 있을 때 군민을 위한 일에 앞장서 ‘모두 편안하게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런데 1404년, 한창 야망을 펼칠 나이에 돌연 고향으로 내려왔다. 바로 부모님의 봉양을 위해서였다. 이후 나라의 부름으로 다시 관직에 나아갔으나 결국 1426년(세종 8년) 한산 군수에서 물러나 노부모를 모시는 데 정성을 기울였다. 입신양명과 성공을 우선시하는 세상에서 상당히 보기 드문 선택을 한 셈이다.
한겨울 엄동설한에 미나리와 잉어를 구한 정성, 성군마저 감탄하다
이처럼 김덕숭이 효를 통해 부모에게 도리를 다하는 과정에서 비롯한 재미있고 신기한 이야기들은 마치 전래동화의 한 구절을 연상케 한다.

노환으로 병석에 누운 어머니가 어느 날 꿩고기가 먹고 싶다고 하니 김덕숭은 매일 같이 산신당에 나가 기도를 올렸다. 산신(山神)이 그 마음을 갸륵하게 여겼는지 꿩이 스스로 날아들었다.

효도를 돕기 위해 제 몸을 바쳐 날아들었다는 꿩도 흥미롭지만, 뭐니 뭐니 해도 백미는 눈 속에서 미나리와 잉어를 구했다는 기록이다. 효자비와 각종 문헌에서 널리 알리고 있는 이 에피소드는 간절한 마음이 일궈낸 기적이라고 할 수 있다.

아픈 어머니가 엄동설한에 미나리와 잉어를 찾았다. 그러자 김덕숭은 깊은 계곡을 다니며 눈 속을 파헤친 끝에 냉기가 올라오는 데도 풍성하고도 파릇파릇한 미나리를 찾아 드시게 했다. 또, 백곡저수지 아래 여계곡(女溪谷)에서 얼음 위에 무릎 꿇고 여러 날 기도를 하니 앉은 자리가 녹아 생긴 구멍에서 잉어 두 마리가 튀어 나왔다. 한 마리는 놓아주고, 다른 한 마리를 끓여드렸더니 어머니의 병환이 씻은 듯이 나았다.
< 김덕숭의 효심을 칭송하는 정려기(출처 | 디지털진천문화대전, jincheon.grandculture.net) >
하늘도 감탄했다는 효행은 마침 안질 치료를 위해 충북 청원군 초정(椒井)에 거동한 세종에게도 전해졌다. 이에 그 덕을 칭송하는 의미에서 직접 술과 고기를 하사하고, 충청감사로 하여금 술과 고기, 쌀 10가마 등을 특사하게 했다. 김덕숭과 아버지가 행재소(行在所, 궁을 떠난 임금이 머무르는 곳)를 찾아 감사 인사를 하는데, 두 사람 다 백발이라 임금이 부자(父子)를 구분하지 못했다고 한다. 김덕숭이 70대에도 아흔이 넘은 부친을 돌보느라 고생했다는 주위의 말을 듣고 탄복한 세종은 이들에게 옷 한 벌씩을 내렸다.
< 조선 문신 신잡(申磼)은 김덕숭을 기리는 백원정을 지었다(출처 | 문화재청, www.cha.go.kr) >
삼강행실도와 백원서원이 전하는 지극한 효심의 가치
안타깝지만, 효성으로도 흐르는 시간은 막을 수 없는 법이다. 어머니가 84세의 나이로 별세하자 김덕숭은 묘 근처에 여막을 짓고 애통해하면서 아침저녁으로 밥을 지어 올렸다. 그러면서도 집을 오가며 아버지를 모시는 데 소홀히 하지 않고 삼년상을 치러냈다. 설화에 의하면 여묘살이를 하는 첫날 밤에 호랑이 두 마리가 여막 좌우에 앉아 지켰다고 한다. 낮에는 다른 곳에 가고, 밤에는 근처에 와서 행여나 탈은 없는지 살폈는데 3년이 지나자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는 것이다.

무사히 상을 마친 후에는 아버지 곁에서 떨어지지 않고 모셨다. 이와 같은 마음은 처가에도 다르지 않아서 1437년에 홀로 사는 장모 정 씨를 집으로 모셔와 마치 친어머니 대하듯 봉양했다.

그런데 1444년 7월,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와 합장하고, 애끓는 심정으로 다시 묘살이를 시작했다. 새벽부터 밤중까지 무덤을 지킨 그는 요와 이불을 깔지 않고 자며 죽으로만 끼니를 연명해 지팡이를 짚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보다 못한 주변에서 말리자 김덕숭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아버지를 땅에 묻고 차마 집에 돌아와 먹을 수 없는 일이다. 더구나 양친을 잃고 내 나이 칠십이 넘었는데, 억지로 살아서 다시 누구를 위하겠는가. 비록 뫼 옆에서 죽더라도 한이 없다.”
< 김덕숭의 묘 (출처 | 디지털진천문화대전, jincheon.grandculture.net) >
< 연극<효자 김덕숭>의 한 장면(출처 | 극단 햇살의 연극<효자 김덕숭>) >
이토록 절절한 마음이 또 있을까. 1448년, 자신이 할 수 있는 효도를 모두 행한 그는 76세의 나이로 숨을 거뒀다. 김덕숭의 생애와 효심은 세종이 후세에 전하게 한 삼강행실도에 남아있다. 조선 전기 문신인 신잡(申磼)은 백원서원을 세워 제향하고, 백곡저수지 근처 절벽에 백원정을 지어 존경과 추모를 표했다.

효성의 흔적은 지난 2005년 충청북도 기념물 제134호로 지정한 진천군 이월면의 효자문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2017년에는 진천군청이 주최하고, 극단 햇살이 구성한 연극 <효자 김덕숭>이 무대에 올라 대중의 박수를 받았다. 그는 떠난 지 오래지만, 위대한 효의 정신은 여전히 이 시대와 지역인들의 마음에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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