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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강 정철의 발자취를 찾아서 – 진천 정송강사(鄭松江祠)

NHI Column · 장소탐방

송강 정철의 발자취를 찾아서

진천 정송강사(鄭松江祠)
충북혁신도시에도 산과 들에 가을이 물들기 시작할 무렵, 진천군 문백면에 위치한 정송강사(鄭松江祠)를 찾았다. 정송강사는 충청북도기념물 제9호로 지정(1976년 12월 지정)된 시도 기념물로, 우리에게 익숙하고 유명한 조선 시대의 문신이자 가사 문학의 대가인 송강 정철(鄭撤 : 1536∼1593)의 위패를 배향한 곳이다.

송강 정철은 굳이 역사와 국문학에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도 한번 이상은 들어봤을 유명한 인물이지만 간략하게나마 부연 설명을 하자면, 우리에게 '관동별곡','사미인곡','속미인곡' 등 가사문학의 대가로 잘 알려져 있으며, 당대의 정치사에서도 그의 진면목을 쉽게 찾을 수 있다. 그는 조선 중기 이후 정치·행정의 전면부에 나서게 된 사림 정치, 그 중에서도 서인의 영수로 활동하면서,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치열하게 상대 당파에 맞서며 당쟁으로 인한 흥망성쇠를 계속했던 인물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정송강사는 우리원에서 약 20KM 떨어져 있어, 넉넉하게 30분 내외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위치하고 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원래 묘소가 경기도 고양시 원당면에 있었으나 1665년(현종 6년) 송시열(宋時烈)이 현재의 장소를 정하고 후손 정포가 이장하여 사우를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정송강사의 길목에서 필자를 멈추게 했던 ‘놋점행복마을’ 표지석, 마을 이름이 이유를 알 수 없는 미소를 머금게 했다.
정송강사 입구의 안내 표지판, 정철의 유명세에 비하면 표지판의 규모가 초라하게 느껴졌다.
입구에 들어서게 되면 수려한 가지를 하늘 높이 뽐내고 있는 나무 한 그루가 찾아오는 이를 가장 먼저 반긴다. 이 나무는 1982년에 보호수로 지정되고 수령이 약 350년이나 된 느티나무로 가을이 왔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어마어마한 가지수를 뽑내며 정송강사의 하늘을 뒤덮고 있었다.
앙상한 받침대가 나뭇가지를 떠받들고 있다. 화창한 여름철에 보면 더욱 좋을 것 같다.
수령은 347세 내외. 조선 숙종 연간에도 이 나무는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을 것이다.
보호수를 기점으로 길은 두 갈래로 나뉘어지는데, 위로 곧장 향하는 길은 송강사로 향하는 길이고, 왼쪽 길은 송강 정철의 묘소로 향하는 길이다. 일단 오늘 탐방의 주 목적인 송강사를 맞이하기 위해 위쪽으로 향한 길로 발걸음을 옮겼다.
정송강사의 안내문과 배치도
정송강사 입구 전경. 송강 정철 신도비(우)와 홍살문(좌)
보호수 바로 뒤편에는 답사 전 여러차례 자료를 통해 접했던 신도비가 자리하고 있다.신도비의 글은 송시열이 지은 것으로 전하고 있으며 오위도총부 부총관 김수증이 전서(빠진 글자를 채워넣음)하고 글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누렇게 바랜 신도비의 표면이 나름 최신식의 보호각과 극명하게 대조를 이루며 세월의 흔적을 전하고 있었다.
송강 정철 신도비 전경
우암 송시열이 글을 지은 것으로 전하는데 탁본이나 해석문은 아쉽게도 찾아볼 수 없었다.
홍살문을 지나 올라가보면 큰 문이 모습을 드러내는데 문청문(文淸門)이라 한다. 송강사의 외삼문으로 첫 번 째 관문이라 할 수 있는데 문청문을 마주보고 좌측에는 송강정철 시비가 있고 우측으로는 온시숨터(도서관)라는 건물이 있다. 송강정철의 시비는 1968년 월탄 박종화 등 문인들의 선생의 창작 정신을 기념하기 위해 세운 것인데, 시비의 뒤편에는 학창시절 시험장에서 만나게 되면 ‘헉’소리 나게 했던 그 유명한 ‘사미인곡’의 한 구절이 새겨져 있었다.
송강사로 향하는 외삼문인 ‘문청문’
송강정철 시비, ‘사미인곡’의 유명한 대목이 적혀 있다.
문청문을 지나서면 바로 우측에 ‘송강기념관’을 접하게 된다. 아담한 규모의 기념관에는 송강 선생의 벼루(용연) 등 유품들이 말끔하게 정리되어 있다. 이 가운데 용연과 옥배, 은배가 눈길을 끌었는데 선조 임금이 송강 선생에게 하사한 물품들로 알려져 있다.
송강기념관의 내외부 모습, 촉박했던 탐방 일정으로 천천히 둘러보지 못한 것이 무척 아쉬웠다.
송강사의 내삼문인 충의문(忠義門)을 지나면 드디어 송강사(松江祠)가 모습을 드러낸다. 송강사 내부의 선생의 위패와 영정을 접하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경건해지는 느낌이었다. 방문 당시 평일이라 그런지 함께 구경하는 이가 하나도 없어 더욱 차분한 분위기 속에서 사당 내부를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송강 선생의 영정에서 시대의 온갖 모진 풍파를 겪고난 뒤, 이제는 평온한 모습을 한 조선 사대부를 만나볼 수 있었다.
송강사의 내삼문인 충의문
송강사 내부, 선생의 위패와 영정이 봉안되어 있다.
송강 선생에게 약소하게나마 인사를 드리고, 다시 내려와서 출입구에서 만났던 또 다름 갈림길로 빠르게 발걸음을 옮겼다. 아직 이른 시간(16시경)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너무나도 고요한 송강사의 분위기는, 조금이라도 시간을 지체하면 선생의 묘소가 있는 곳에 가지 못할 것만 같은 부담감까지 느끼게 했다. 기분 탓인지, 벌써 어두워져 가는 느낌까지 들었을 정도였다.
묘소 입구, 이정표와 길목이 왠지 모르게 초라하게 느껴졌다.
400m남짓한 거리이지만 경사가 상당하다.
수백 개의 밤송이들로 이루어진 산길을 지나 야트막한 동산의 정상부에 다다르니, 정돈되지 않았던 산길과는 달리 깔끔하게 정돈된 곳에 선생의 묘소가 자리하고 있었다.
묘소에는 두 개의 묘가 있는데 앞에 있는 묘는 선생의 둘째 아들인 종명의 묘이고 뒤쪽에 있는 묘가 선생과 부인 문화유씨를 합장한 곳이다. 묘비에는 ‘유명 조선좌의정인성부원군 시 문청공 송강정철지묘’이라 적혀 있는데, 뜻을 찾아보니 명나라의 속국인 조선 좌의정 정철의 묘‘ 정도로 풀이된다. 당시의 외교관계가 묘비에도 영향을 끼치다니! 당대에는 보편적이었다고는 하나 왠지 모를 씁쓸함이 느껴졌다.
묘소에 위치한 두 개의 묘, 뒤쪽이 송강 정철과 부인 문화 유씨의 합장 묘 이다.
송강 정철과 부인 문화 유씨의 합장 묘
학창 시절 국어 교과서와 여러 역사서 통해 숱하게 접했던 송강 정철, 한 시대를 풍미했던 정치인이자 지식인의 사당과 묘소를 접하고 나니 숙연함이 절로 묻어나왔다. 선생은 생전에 본인이 이렇게나 후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끼치리라 상상이나 했었을까? 선생에게 관료의 삶과 문학가의 삶,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했다면 무엇을 택했을까? 나에게 택하라고 한다면 나는 과연 무엇을 선택할 수 있을 것인가? 꼬리에 꼬리를 무는 무한 상상을 하며, 다시 사무실로 발걸음을 돌렸다. 복잡한 업무 일과로 인해 한번쯤 사무실 가까운 곳에서 힐링의 기분을 느끼고 싶다면, 강력하게 정송강사의 방문을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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